오병환의 백과사전

 

파란의 제30회 뮌헨세계대회 뒷얘기

전 회에서 언급했듯이 제30회 뮌헨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최초로 남녀 선수단이 함께 출전했던 관계로 그 어느 때보다 마음가짐이 단단했다.

남자의 경우 전 해 있었던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예상치 않게 인도네시아 팀에게 무릎을 꿇어 3위를 겪는 수모를 겪었었다. 또한 그 일이 국내 선수선발 과정에서도 천대를 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3명의 선수만 파견하는 어처구니없는 대한체육회의 야속한 방침이 있었던 탓에 더욱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자는 이에 반해 1967년과 68년 개인전 및 단체전에서 차례로 아시아 정상에 올랐으므로 세계 제패라는 큰 꿈을 안고 참가했다. 때문에 출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은 여자단체의 상위입상을 한껏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9년 도르트문트세계대회 이후 10여년 동안 세계무대와 벽을 쌓고 아시아 울타리 안에서만 움직여 왔던 터라, 10여년 만의 세계진출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참가국은 남자가 51개국에서 234명이, 여자는 39개국에서 141명이 참가했다. 단체전 대진방법은 참가팀을 12개조로 나눈 뒤 다시 6개조씩 A, B 그룹으로 나누어 예선리그를 벌여 각조 우승팀끼리 그룹별로 준결승 리그를 실시, 순위를 결정했다.

제30회 뮌헨세계대회에서 남자단체 4위를 하는데 맹활약을 펼친 정차현 선수가 체코의 야로슬라브 스타네크와 경기를 하고 있는 장면.

한국 남자팀은 예선리그 B6 그룹에 속하여 스페인, 이탈리아, 캄보디아와 대전하여 각각 스트레이트로 물리치고 무난하게 예선리그 관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준결승 리그에서 B그룹에 속해 아일랜드(5대0), 스웨덴(5대2), 서독(5대3), 체코(5대2), 프랑스(5대0)를 제끼고 2위에 오른 뒤 유고와의 경기에서 0대5로 패하여 4위에 머물렀던 것이다.

또한 예선리그 B그룹에 속했던 여자팀은 미국, 노르웨이를 모두 3대0으로 물리쳐 준결승에 진출, B그룹 승자전에 임하게 되었다. 당시 B그룹에는 소련, 체코, 영국, 유고, 폴란드가 속해 있었는데 유고와 폴란드를 3대1로 이겼으나 체코(3대0), 구소련(3대1)에게 패하고 영국을 3대0으로 이겨 그룹 3위에 머물러 5,6위전을 치렀다. 이때 여자 팀은 A그룹 3위였던 서독에게 3대0으로 완패를 당해 6위에 랭크되고 말았다.

여자복식에서는 최정숙, 최환환 조가 준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소련의 루드노바, 그린버그 조와 대접전을 벌인 끝에 역전, 3위를 차지했다. 당시 그 경기를 지켜보던 한국탁구 관계자들의 심정은 퍽이나 안타까웠다고 한다.

남자의 경우 선수선발 때만 하더라도 누구를 선발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놓고 진통을 겪을 만큼 불안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충용, 주창석, 정차현 세 선수가 기대 이상의 성적인 4위를 차지한 것은 여러모로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남자탁구 사상 최초의 좋은 성과라는 점과 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뮌헨세계대회 여자복식 3위를 차지한 최정숙, 최환환 조가 시상대에서 꽃다발을 흔들고 있다.

여자의 경우는 기술은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았으나 국제경기 적응부족과 체력의 열세가 결정적인 패인이라 하겠다. 사실 1위부터 6위까지는 우세를 확연하게 가릴 수 없는 고만고만한 실력차이를 보이므로 당시 이경호 감독은 “세계 정상은 먼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라는 말로 자신감과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자 복식에서 비록 우승은 못했으나 3위에 머문 최정숙, 최환환 두 선수의 쾌거는 한국 여자 탁구 사상 초유의 성적이었으므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리고 세계대회 기억을 마무리하는 지금 시점에서 한두 가지 잊히지 않은 뒷이야기 하나를 해야 할 듯싶다. 세계대회 이전에 있었던 스웨덴 전지훈련 때의 일이다. 오상영 코치가 급성 맹장염으로 현지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낯선 타국에서 그와 같은 병치레를 하게 되어 몹시 황당했을 오상영 씨였지만, 그 와중에서도 선수들을 의지로 잘 지도하여 4위까지 끌어올린 것은 좋은 얘기로 전해졌다.

이와는 반대로 귀국길에서 지도자가 선수들을 구타하는 일이 발생, 해단식장에서 선수 가족과 팀 관계자들이 항의하는 소동이 일어 협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는 해프닝도 벌어졌었다. 그 내용을 자세히 기재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어 접어두지만 아무튼 제30회 세계대회는 시작부터 끝까지 파란 많은 대회였다.

 

여자탁구의 신성(新星) 이에리사

이쯤해서 이에리사에 대해 언급했으면 싶다. 제30회 세계대회 무렵 그녀는 탁구계 신동으로 불리웠을 만큼 뛰어나 탁구재능을 지닌 선수였다. 탁구가 한국에 도입된 이래 신동이라는 말을 들은 이들이 많지는 않지만 간혹 있어 왔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그녀가 아닐까 싶다.

당시 한국 여자탁구는 위쌍숙, 조경자, 최정숙, 최환환으로 이어졌는데 그 뒤를 잇는 것이 바로 15세의 여중생이었던 그녀였다. 탁구인들 둘 이상만 모였다 하면 그녀의 얘기를 할 만큼 주목과 기대를 한껏 받았던 것이다. 즉 그녀의 등장은 탁구계의 경사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그녀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겠지만 이 지면에서는 가장 기억에 남는 것들을 몇가지 적어보고자 한다.

혜성처럼 나타난 이에리사 선수의 15세 소녀시절 모습.

1969년 장충체육관에서 있었던 제23회 전국남녀종합탁구선수권대회 때다. 탁구경력 3년밖에 안되는 문영여중 3학년에 재학중이었던 그녀가 대회 최종일 많은 선배들을 물리치고 여자단식 결승에 진출한 것이다. 이도 놀랄 일인데, 더더욱 놀라게 한 것은 한일은행의 김인옥 선수를 시소게임 끝에 2대1로 이겨 종합선수권자가 되었다.

당시의 경기를 세부적으로 설명해보면, 산업은행의 최용안 선수를 2대0으로 가볍게 물리친 그녀는 김인옥 선수와의 결승에서 첫 세트를 21:14로 이긴 뒤, 둘째 세트를 14:21로 빼앗겼으나, 마지막 세트인 3세트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각투를 벌이며 결국 21:19로 제압하는 놀라운 이변을 연출했다.

그것은 전례없는 일이었으며 앞으로도 이와같은 이변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다. 그녀는 또한 전일 있었던 소녀부 단식결승에서도 두 해 선배인 서울여상의 성낙소 선수를 2대0으로 가볍게 이기고 패권을 이미 잡아 놓은 상황이기도 했다.

그 대회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그날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어린 소녀 선수의 놀라운 기량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 대회를 통해 그녀는 명실공히 한국 여자탁구의 제1인자로 등극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탁구계에는 또한 새로운 희망이 생긴 셈이었다.

철저한 공격수인 그녀는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강력한 스매싱과 날카로운 볼 감각으로 상대를 압도, 강한 정신력과 체력 등으로 이후에도 한국 여자탁구의 정상을 은퇴전까지 내놓지 않았다.

또 경기가 끝난 직후 아름다운 얘기 하나가 있다. 경기가 끝난 뒤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패자인 김인옥 선수가 다가가서는 “나는 오늘 120%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러니 네가 나보다 더 훌륭했다고 칭찬해 준 것이다. 또 서브시 볼을 띄우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충고까지 해주는 흐뭇한 광경은 그야말로 너무나 예쁜 모습이었다.

 

1969년 장충체육관에서 펼쳐진 제23회 전국남녀종합선수권대회 때 산업은행의 최정안 선수와의 준준결승전. 이 경기에서 이에리사는 2대0으로 이긴 후 결승에 진출, 역시 산업은행의 김인옥 선수를 제쳐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녀는 이때 기자들에게 “다만 최선을 다했으며, 마음을 편안히 갖고 했습니다라는 말로 기쁨을 대신했다. 어린 나이의 그녀였지만 기쁜 마음을 그리 크게 보이지 않고 초연한 모습을 보인 것 또한 잊을 수 없다.

대개의 경우 한참 어린 후배에게 패하고 나면 속상해서 울거나 마음 상해 한마디도 건네고 싶지 않은 터인데, 그러지 않고 격려해 준 김인옥 선수도 선수들이 꼭 본받았으며 하는 마음이다. 아울러 승리를 안은 선수도 상대를 생각해서 너무 들뜬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할 것도 함께 말이다.

그녀의 탁구시작은 대전 대흥초교 4학년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부터 재능을 보인 그녀는 충남 홍성여중 1학년때 전국종별선수권대회를 참가, 선수로서의 재질을 인정받으면서 서울 문영여중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백송빈 감독과 손병수 코치의 지도를 받으면서부터 빠른 발전을 보이며 각종 대회를 석권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침착한 게임운영으로 학창시절부터 이미 아시아는 물론 세계탁구까지 장악할 수 있는 재목감으로 인정받았다. 탁구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당시 언론인들도 같은 예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감대로 그녀는 정말 대단한 기량을 발휘하여 한국 여자탁구의 한 획을 긋는 인물로 성장해 나갔다.

일례로 종합선수권대회 연속 7연패라는 대단한 기록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사라예보의 주역으로 큰 일을 해내기도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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