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선수단 선발과정에서의 난항

탁구하면서 죽겠다고 까지 선포한 김창원(작고) 회장의 취임이후 가장 큰 관건은 1969년 4월 17일부터 27일까지 뮌헨에서 열리는 제30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였다. 전년도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를 제패하고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과 세계제패를 꼭 이루겠다는 약속을 했던 터라 김 회장이 더욱 심혈을 기울이게 된 것은 뻔한 일일 것이다.

김 회장은 세계대회를 눈앞에 앞두고 선수선발부터 강화훈련까지 직접 참여하는 한편 되도록 넉넉한 지원을 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선수단 훈련비용과 대회참가 경비 일절을 탁구협회에서 전담하기로 하여 그 어느 때보다 여건 좋은 상황에서 세계대회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수선발 과정에서 어려운 점이 속출, 많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원래 예부터 선수선발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고이 넘어가는 법이 없는 것이 전례처럼 되고 있긴 했지만, 당시는 예상보다 복잡하고 힘들었다. 그에 관한 얽힌 얘기는 이렇다.

1968년 11월 26일부터 27일까지 일단 1차 선발전을 개최하여 남녀 각 16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13, 14일 이틀간에 걸쳐 2차 선발전을 통해 남녀 각 4명을 성적순으로 선발하며, 나머지 인원인 남녀 각 4명은 이사회에서 추진키로 했다.

이로써 세계대회 파견 선수단은 총 남녀 각 8명으로 좁혀졌고, 이듬해 2월 중순 다시 최종 참가선수를 결정하며, 1월 중순부터 산업은행 연수원(지금의 하남시 강변) 체육관에서 1차 강화훈련을 실시했다.

 

대회에 참가했던 남녀 선수단.

그런데 문제는 최종 엔트리를 결정하기 위한 추천 선수, 특히 후보 선수를 둘러싸고 열린 이사회다. 2월 14, 15일 양일간에 걸쳐(이사회는 약 8시간이 소요되었다) 그간 선발해 놓은 남녀 각 8명 중 남자는 5명, 여자는 6명을 파견키로 한 뒤 바로 추천에 들어갔을 때 다음과 같은 의견에 합의가 모아졌다.

즉, 선수선발전 성적을 전혀 감안치 않고 국제대회 적응도를 감안, 1개월간의 훈련과정을 토대로 선수를 추천키로 원칙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정작 선발된 선수들은 성적순이었으며, 특히 후보 선수 건에 대한 마찰이 심하게 대두되어 험난한 선수선발을 거쳐야만 했다.

이때 우선 김은태, 김충용, 정차현, 주창석, 문용수(이상 남자) 선수를 20여분도 안 되는 토론 끝에 선발했으며, 이어 여자는 단체전 멤버인 최정숙, 김수경, 노화자, 최환환을 먼저 만장일치로 결정한 뒤 나머지 선수를 뽑기로 했다.

그리고 2년 후를 대비한 후계자를 꼽아 소위 정책선수(지금 말하면 후보 선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두 명을 선발하기로 결의가 모아졌다. 이때 정현숙(동덕여고), 임원숙(서울여상), 김길자(한일은행) 등이 거론되었는데, 이때 두 가지 의견이 엇갈렸다.

 

당시 남자선수단은 8위가 목표였으나 4위를 기록, 남자탁구의 전망을 밝게 했다(좌로부터 김충용, 김창원 회장, 이경호 감독, 정차현, 주창석).

한 편에서는 당장의 성적보다 내일의 대성을 기대해 봐도 좋을 만한 선수를 선발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것은 바로 국제경험과 세계탁구의 흐름을 파악하고 배우게 하자는 의미에서 정현숙, 임원숙 등 신인을 뽑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아무리 정책이지만 선발전 순위 8위인 임원숙을 선발하고 5위의 김길자를 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또한 4년 후의 세계대회까지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유망주임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양측의 이 같은 의견은 한 치의 양보가 없어 팽팽해질 수밖에 없었다. 첫날 회의 때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장장 4시간에 걸쳐 열띤 토론을 했으나 좀처럼 결말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만약 12시 통행금지가 없었다면 더 늦은 시간까지 하거나, 아니면 아예 밤을 새워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런 이유로 부득이하게 다음날 저녁 6시에 다시 하기로 하고 일단락하게 되었다. 당시 이사회 총진행은 강재량(작고) 부회장이 맡아 했는데, 중요한 선수선발 문제이니 만큼 전 임원의 만장일치를 원하던 터라 가능한 한 표결형식을 취하지 못했던 것도 장시간 회의의 원인이기도 했다.

당시 뮌헨 세계대회에 관한 기사가 실린 스크랩 사진이다. 비록 상태는 좋지 않으나 그때를 추억하는 탁구인들이 있을 것이다.

또한 강재량 부회장은 1960년도 초반 국회 참의원을 지낸바가 있는 터라 회의를 어물어물 형식적으로 진행하는 분이 아니었다. 때문에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되풀이 해가며 능수능란한 회의를 진행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지연되었던 듯싶다.

이튿날 속개된 회의에서도 여전히 같은 말들만 돌고 돌뿐 도무지 뾰족한 결론을 못 낼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결국 밤 10시가 되어서야 표결로 정현숙, 임원숙 두 명을 여고선수로 결정하고 회의를 종료했다. 정선수 4명을 뽑는 데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으면서, 후보 선수 뽑는데 이틀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탁구협회 역사상 가장 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추천에서 빠진 김길자 선수의 소속팀인 한일은행 측이 대한체육회에 진정서를 제출, 꼬리를 물고 나선 것이다. 또한 이 일로 각 매스컴이 부정선수선발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기사화하는 바람에 큰 물의를 일으키고 말았다.

일이 커지자 급기야 대한체육회가 선서선발 경위 및 일부팀의 진정서를 토대로 검토에 들어가는 상황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우선 대한체육회는 북한이 세계대회에 참가함으로써 경우에 따라 실력대결이 불가피함을 감안, 명실상부한 강팀을 파견해야 한다는 기본방침을 강하게 내세웠다. 아울러 추천으로 뽑은 선수에 대해 경기단체 입장에서 볼 때 정책적인 배려라는 측면에서는 일단 수궁이 가나, 이번 세계대회 경우 종래의 다른 대회와는 성격이 엄연히 다른 만큼 철두철미 실력본위로 구성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대한체육회 파견심의위원회에서는 당초 11명(남5,여6)에서 8명(남3,여5)으로 축소하여 재 선발 하라는 조건부 승인이 내려졌다.

이 같은 대한체육회의 결정에 대해(특히 남자선수 3명 파견에 따른 문제) 재심요청을 했으나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만약 단체전 출전 시 한명이라도 몸이 아파 출전을 못할 경우 기권을 해야만 할 형편이 되고 말았다.

탁구협회는 이와 같은 승인으로 긴급 이사회를 소집, 남자는 최종선발전에서 14전 전승으로 1위를 한 김은태를 비롯하여 1차 대회 1위 및 최종선발전에서 5위를 차지한 문용수를 국제 적응력 부족이라는 이유를 달아 표결로 제외시켰다. 여자는 장장 8시간의 논란을 거듭하며 뽑은 임원숙을 제외시키기로 했다.

이쯤에서 일이 일단락 될 줄 알았으나, 이 결론에 일부 이사들이 정족수가 안 된 이사회는 불법이라고 주장, 탁구협회 사무실 집기 등을 집어던지며 시정을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 현장은 그야말로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정차현 선수에게 작전을 지시하는 이경호 감독의 모습이다.

비록 보지는 못했더라도 서로가 으르렁거리며 이것저것을 집어던지는 탁구인들의 모습을, 그것도 한국탁구를 이끌어 나가는 임원들의 행태를 상상해 보면 가히 어떠했으리라는 짐작이 충분히 갈 것이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라도 선수선발 문제를 둘러싼 마찰은 여전한 듯싶다. 앞으로 역시도 그러하리라는 생각이다.

아무튼 제30회 뮌헨 세계대회 선수선발은 이 같은 진통 끝에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 김창원 회장이 단장을, 이경호 씨가 감독을, 오상영 씨가 남자코치를, 천영석 씨가 여자코치를 맡아 총 12명의 선수단을 구성하고 최종 훈련에 들어갔다.

3월 31일 선수단은 체육회관 강당에서 결단식을 갖고 여자는 5위를, 남자는 8위가 목표임을 발표했다. 선수단은 또한 이 목표를 달성코자 스웨덴에서의 전지훈련과 친선경기를 하기로 했으며, 이를 위해 4월 4일 장도에 올랐다.

한국탁구가 세계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1956년 제23회 동경 세계대회 이래 다섯 번째이지만, 남녀 개인 및 단체전에 모두 출전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우리 선수단은 남자단체 4위, 여자단체 6위, 여자복식 3위를 차지했다. 대회에 관한 자세한 얘기와 전적은 다음 회에 다뤄보기로 하겠다.(계속)

저작권자 © 더 핑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