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참가전망과 전력분석

가깝고도 먼 평양, 1979년 4월 25일부터 5월 5일까지 북한의 심장부 평양에서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리는 해를 맞았다. 한국 탁구팀이 과연 평양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게 될지는 당시로서는 전혀 미지수, 선수들은 출전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세계 탁구는 정치 바람 속에 휘말려 4개월 뒤의 일을 알 수가 없었다.

만일 평양행이 이뤄진다면 스포츠 남북교류의 역사적인 길이 열릴 것으로 꿈에 부풀었다. 세계정상탈환 남북대결 승리라는 의미보다 한국이 이 대회에 참가할 경우 스포츠를 통한 최초의 남북왕래가 이루어진다는 점에 촉각이 모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탁구협회는 그 전해에 개최된 전국 종합선수권대회를 겸해 1차로 선수선발전을 개최했고, 해를 넘기면서 1월 5일부터 3일 동안 평양에 갈 대표선수 최종선발전 개최준비로 분주했다.

최종 엔트리 신청마감은 1월 21일이었다. 대회를 주최하는 평양조직위원회는 위원장 김득준의 이름으로 국제탁구연맹(ITTF)을 통해 그 전해인 1978년 10월, 전 회원국에 정식 초청장을 보냈다. 물론 우리나라도 국제탁구연맹을 통해 접수했으나 비자 발급이라는 최종절차가 남아 있었으므로 한국 선수단의 평양행이 결정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한국은 평양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국제탁구연맹 로이 에반스 회장, 서독의 쉴라프 부회장 등 국제기구 인사를 초청하는 등 다각적인 외교활동을 펼쳤으며 모든 회원국을 초청한다는 간접적인 보장을 받고 있었다.

북한은 1977년 영국 버밍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제35회 대회를 유치하기에 앞서 1975년 아시아탁구연합(ATTU) 주최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를 개최, 이미 리허설을 가진 바 있다. 그 대회에 참가했던 외국 선수, 기자들에 의하면 체육관 시설과 체육관 바로 옆에 선수촌을 갖추었다고 했다. 당시 남북의 탁구수준을 견준다면 남녀 모두 열세, 서로가 세계 상위수준을 자랑할 만큼 여자는 해볼 만했지만 국제성적으로는 북한이 앞서 있음을 협회는 자인했다.

평양에서 코르비용컵을 되찾으려 했던 한국의 꿈은 이루어질 것인가. 사진은 77년 버밍엄 대회에서 분전하고 있는 이기원 선수의 모습.

북한은 세계대회 단식 2연패의 박영순 외에 박연옥, 김창애 등을 세계무대에 내보내 그동안 전력을 다져왔다. 게다가 북한이 탁구강국 중국을 등에 업고 국내기반을 닦는 동안 한국은 아시아무대에서 기존 아시아연맹(ATTF) 축출로 고립 5년간의 침체를 가져야 했었다. 또한 정현숙, 이에리사의 은퇴 이후 대표 팀 전열에 공백이 생긴데다 김순옥 마저 퇴진, 한국 여자의 전력은 당시 10여년 사이에 가장 약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탁구도 아시안게임 5위로 일보 후퇴, 그 당시 가장 어려운 입장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수준의 낙후와 스포츠 외교의 열세를 어떻게 만회, 세계 대회에 대처할 것인지 평양대회를 지켜보는 국내 체육계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북한이 아시안게임에 돌연 여자탁구팀을 보내지 않고 대신 폴란드 오픈대회에 참가한 저의가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세계대회를 앞둔 정책적인 고려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북한은 그 전해에 서울에서 열린 세계 사격선수권대회 참가 초청을 외면했었다.

이번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도 북한이 한국의 참가를 기술적으로 방해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한국으로서는 승부를 초월하여 당시 평양대회에 참가하겠다는 기본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그해 정초, 많은 체육인들은 국제탁구연맹이 한국의 참가를 적극 지원하고 있었으므로 북한이 한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국제 여론의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고 있기도 했다.
 

평양세계대회 참가 한국대표 최종선발전

1978년 12월 평양세계선수권대회 파견 대표 1차 선발전을 겸해 치러진 전국 종합선수권대회를 통해 남녀 각 22명씩을 선발한 협회는, 1979년 1월 5일부터 대광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최종선발전을 개최했다. 풀리그로 3일간 치러진 이 대회에서 남녀 각 3명씩을 성적순으로 선발하고 남녀 각 2명은 협회 이사회에서 추천 남녀 각 5명씩을 대표로 확정짓기로 했다.

제35회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 파견 대표선발전에서 19승 1패로 여자부 1위를 차지한 이수자 선수.

평가전 결과는 여자부에서 이수장, 김경자(이상 시온고), 안해숙(부산 계성여상)이 선발되었고, 남자부에서는 김완(신진공고), 조동원(삼양식품), 손성순(대우중공업) 선수가 선발되어 제35회 세계선수권대회 파견 대표선수로 뽑혔다.

처음 대표로 선발된 선수들이 여자부의 김경자, 안해숙, 남자부의 조동원, 손성순 등 4명에 이르렀을 만큼 대표팀의 얼굴이 대폭 바뀌었다. 최종평가전에서 안해숙은 정경자(대성여상)와 15승 5패로 동률을 기록하고 똑같이 세트 득점 33, 세트실점 15점을 마크하며 성적순으로 뽑는 마지막 자리를 두고 숨 막히는 접전을 벌였는데 최종 선발기준 승자승에서 극적으로 선발권 내에 들어갔다.
 

여자부 1위 이수자(당시 시온고)와 함께 당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남자부 1위를 차지한 김완(당시 신진공고).

전진속공형의 정경자는 이수자, 박홍자, 이기원 등 국가대표 선수들을 모두 꺾어 파란을 일으켰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여중 3년생인 박말련(문영여중)에게 0대 2로 어이없이 패배, 아깝게 탈락하고 말았다.

남자부에서는 전날 2위로 떨어졌던 김완(신진공고)이 조동원과 16승 3패로 동률을 기록했으나 세트득실에서 1세트 앞서 1위를 되찾았으며, 조동원은 이날 고교생 김기택(청주고), 전영호(성수고)에 각각 무릎을 꿇어 2위로 물러났다.
 

--------------- 선수별 승패순위 ---------------

남 자 부

여 자 부

1위

김완(신진공고)

16승 3패

1위

이수자(시온고)

19승 1패

2위

조동원(삼양식품)

16승 3패

2위

김경자(시온고)

18승 2패

3위

손성순(대우중공업)

15승 4패

3위

안해숙(부산계성여상)

15승 5패

4위

박이희(상무)

14승 5패

4위

정경자(대성여상)

15승 5패

5위

유시흥(성수고)

14승 5패

5위

박홍자(서울신탁은행)

14승 6패

6위

윤길중(삼양식품)

13승 6패

6위

윤경기(문영여중)

13승 7패

7위

김기택(청주고)

11승 8패

7위

이경애(부산계성여상)

13승 7패

8위

이경철(신진공고)

11승 8패

8위

황남숙(성수여상)

12승 8패

9위

오병만(청주고)

10승 9패

9위

신명숙(대한항공)

11승 9패

10위

이재훈(청주고)

10승 9패

10위

김현옥(서울신탁은행)

10승10패

평양 세계선수권대회 파견 대표선수단 확정

협회는 제35회 평양세계탁구선수권대회 파견 대표선수 추천케이스로 남자선수 박이희(상무)와 유시흥(성수고), 여자선수 이기원(산업은행)과 정경자(대성여상) 선수를 선발 남녀 선수 각 5명, 임원 10명 등 총 20명으로 선수단을 구성, 확정했다.

선수단 단장에는 채영철 협회 회장, 부단장에 김찬두 협회 부회장, 총감독에 천영석 전무이사, 코치에 이소광(동아건설), 박종대(서울신탁은행) 씨를 선정했다.

선수단 중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했던 선수는 남자부에 김완과 박이희, 여자부에 이수자와 이기원 등 4명뿐으로 대폭적인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아시아경기대회 남녀팀 주장을 맡았던 이상국과 김순옥은 그 전해인 1978년 말로 은퇴했으며 윤길중과 박홍자는 선발전과 추천케이스에서 모두 탈락했다.

협회는 그렇게 확정 지은 선수단을 그해 1월 20일부터 태릉선수촌에 입촌시켜 본격적인 강화훈련에 돌입했다. 훈련계획에는 예선 리그에서 만날 유럽팀에 대비한 훈련을 위해 3월 17일부터 18일까지 양일간 영국에서 열리는 스코틀랜드 오픈 선수권대회에 참가하고, 귀로에 서독에서 서독 대표팀과 십여 일 동안 합숙훈련을 실시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 선수단 명단

단장: 채영철(협회 회장)
부단장: 김찬두(협회 부회장)
회의대표: 김정립(협회 부회장)
총감독: 천영석(협회 전무)
감독: 백송빈(경기 이사)
총무: 전우준(협회 이사)
재무: 박철규(협회 이사)
섭외: 정주년(협회 이사)
남자코치: 이소광(동아건설)
여자코치: 박종대(서울신탁은행)
남자선수: 김완(신진공고), 조동원(삼양식품), 손성순(대우중공업), 박이희(상무), 유시흥(성수고)
여자선수: 이수자(시온고), 김경자(시온고), 안해숙(부산계성여상), 정경자(대성여상), 이기원(산업은행)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엔트리 발송 및 전력탐색

협회는 평양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4월 25일 ~ 5월 5일) 파견 대표선수단(임원10, 선수10) 최종 엔트리를 1979년 1월 10일 발송했다. 채영철 협회회장은 무교동에 위치한 대한체육회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선수단 최종 엔트리를 국제탁구연맹(ITTF)에 발송, 국제연맹이 평양조직위원회에 보내기로 약속받았다고 밝혔다.

경기성적을 초월, 참가에 의의를 두고 평양 세계대회 참가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고 말한 채회장은 가능하면 가까운 판문점을 통해 평양을 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아시아에 위치한 국가들은 싱가폴에 집결, 전세기편으로 평양에 가게 되어 있으나 중국 경유에 어려움이 있을 것을 고려, 국제연맹의 제의에 따라 4월 19일 제네바에 모여 모스크바를 경유, 입국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채회장은 지난해 7월 내한한 국제연맹 토니 부록스 사무총장으로부터 예비 엔트리를 받아 8월 22일 국제연맹을 통해 예비 엔트리를 발송했으며, 정식 엔트리는 10월 25일 역시 국제연맹을 통해 접수했다고 그동안의 경위를 설명하고 국제연맹으로부터 대회 참가를 보장받았다고 거듭 확인했다.

선수단의 전력약세를 인정한 채회장은 평양 세계대회 참가에 의의를 갖고 81년 유고 제36회 세계대회에서 세계 정상 재탈환을 노리겠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보충해서 대표선수단의 천영석 총감독은 “아직 비관도 낙관도 할 때가 아니다. 앞으로 남은 4개월 동안 속성 훈련을 통해 최대의 성과를 거두도록 최선을 다 해보겠다.”고 조심스런 전망을 표현하기도 했다.
 

새로 구성된 대표선수단이 평양을 가기 위한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모습.

그리고 그는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여자단체전의 경우 한국팀의 난적은 일본이나 북한보다는 절대 강자인 중국과 유럽 선수들이라고 예견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세대교체로 진통을 겪고 있는 일본이나 교과서적인 탁구를 하는 북한은 단시간의 훈련으로서도 충분히 승산을 점칠 수 있으나 쉴 새 없이 강한 좌우드라이브로 공격해 오는 셰이크핸드의 유럽선수들에겐 변화 있는 커트스트로크를 구사할 수 있는 수비형 선수로 맞붙을 수밖에 없는 믿을만한 선수가 없다고 아쉬운 상황을 피력했던 것이다.

당시 천 감독의 평가로는 대표로 선발된 수비형의 김경자, 안해숙의 국제적응도는 20%밖에 되지 않으며, 4개월간의 훈련으로 최소한 50%까지는 올려야 겨우 해볼만하다는 것이었다. 공격형의 이기원, 올라운드 플레이어 이수자, 정경자의 기량도 아직은 믿을만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목표나 성과에 대한 예상은 4개월간의 강화훈련 뒤로 미루겠다는 것이 그의 소감이었다. 아울러 그는 “특히 사고(思考)의 지도방법을 지양, 지도의 과학화와 더불어 선수들에게 풍부한 경험을 쌓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부언했다.

당시 또 하나의 관심사는 전력노출을 꺼려 방콕 아시아 경기대회까지 출전치 않은 북한의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린 맹공을 어떻게 막느냐였다. 개최지가 다른 곳이 아닌 평양이라는 점에서 그 문제는 더더욱 큰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한국이 평양 세계대회에 참가하기까지는 아직 비자발급이라는 마지막 문제가 남아 있어 참가여부가 확실치 않지만 세계의 이목을 모으고 있는 한국 탁구팀의 평양행은 당시 남북대화 무드와 관련, 실현가능성이 짙어진 것으로 분위가 감돌고 있었다. 미·중국 수교 등 당시의 국제정세 변화에 비추어 중국이 한국 스포츠 팀의 초청을 검토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기도 했다. 대한탁구협회는 최선을 다해 평양 세계대회 입성을 기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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