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미국, 평양 세계탁구대회 참가 발표

미국은 1979년 4월 평양에서 개최하는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선수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고 미국탁구협회의 조지 케니디 국제담당 부장이 외신을 통해 발표했다.

그는 “대회 일자를 1년 남겨놓고 북한은 미국탁구협회에 3차례에 걸쳐 초청장을 보내 추진해왔으며 미국탁구협회가 이를 수용, 남자선수 5명, 여자선수 4명, 임원 3~4명 등 총 12명 이내의 선수단을 파견하기로 했다”고 말하고 “선수단 중에는 한국 전 국가대표 출신의 이달준 코치와 나인숙, 박혜자 선수가 포함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유치하면서 모든 회원국을 초청하겠다고 공언한 북한은 1년이 지난 당시 한국과 이스라엘을 초청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한국의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초청여부는 대회 유치가 확정된 1977년 3월 28일(버밍엄) 이후 베일에 가려 있었는데 끝내 북한은 한국과 이스라엘을 초청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의 평양세계대회 참가는 예견된 것이었으나 당시 한국과 미국의 관계,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묘한 때여서 매우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제35회 세계대회 개최지는 원래 미국의 마이애미였다. 미국은 1973년 유고 사라예보 세계대회 기간 열린 총회에서 대회를 유치했다가 재정문제로 반납했었다. 그 후 79년 세계대회 개최지는 일본과 유고를 떠돌다가 77년 버밍엄 세계대회 기간 중 열린 총회 때 평양으로 결정되었다. 물론 중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북한은 총회에서 모든 국가를 초청하겠다는 보증서에 서명까지 했었다.

당시 한국을 비롯하여 미국, 이스라엘의 평양대회 참가에 어려움이 예견되자 미국 대표는 총회 석상에서 “미국도 한국과 같은 입장이다. 미국에는 한국계 선수 나인숙과 박혜자, 그리고 이달준 코치의 출전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명백하게 미국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북한은 이에 대해 모든 회원국을 초청하겠다고 굳게 약속함으로써 유치를 끌어낼 수 있었다. 당시 국제탁구연맹 회장 로이 에반스(작고)는 총회가 끝난 후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측이 모든 회원국의 초청을 약속했다고 발표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러하리라고 예측되었던 상황이긴 했으나 한국의 출전이 봉쇄된 평양대회에 미국이 참가한다는 사실은 평양의 세계탁구대회가 단순한 스포츠대회 이외의 또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주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비록 미국 선수단의 평양대회 참가가 정치성을 띠고 있지 않는 단순한 스포츠 교류라고 해도 당시의 미국 내 분위기와 관련, 이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까닭에 평양대회 참가가 정치성을 띤 것은 아니라고 해도 이것이 미국 북한간의 관계에 하나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긴 눈으로 보면 정치적인 면에까지 발전될 우려가 없지 않은 것으로 보는 눈이 많았다.

모든 것을 정치에 이용하려는 북한이 미국의 탁구 선수들을 스포츠로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미국 선수단의 평양방문 결정이 미국인들의 북한여행 제한 조치 해제 이후 첫 번째 여행 케이스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과 과거 미·중국의 경우에서 보듯 탁구외교가 중국 선수단의 답방을 포함한 광범위한 민간레벨의 접촉으로 확대된 데 이어 정부간의 접촉까지도 유도되었던 점은 앞으로 사태의 유동성을 암시해 줄 수 도 있는 일이었다.
 

미국탁구 이끈 한국인 선수들

미국 스포츠 사절로는 처음 평양에 가게 된 미국 탁구팀의 중심 선수들은 아니러니 하게도 한국 출신들이었다. 미국선수권을 수차례나 차지한 이달준은 임원으로, 그리고 여자 챔피언 나인숙과 박혜자는 미국 대표선수로 뽑힐 것이 확실시되었다.

미국 탁구를 이끌었던 한국 출신 탁구인들. 위로부터 이달준, 박혜자, 라인숙.

그러나 미국은 보통 대회 한 달 전에 대표선수단을 구성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어 그들의 선발은 당시까지는 아직 미지수이긴 했다. 획기적이라면 획기적인 미국 선수단의 평양행은 미국과 북한의 정치적 관계를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그들의 선발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세계대회에서는 남북의 열띤 공방전이 구경거리였는데 평양대회에서는 미국과 북한의 귓속말(?)이 있지 않았을까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말썽의 소지가 있는 한국출신 선수들을 대표팀에서 제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당시 이달준 씨는 미국 시민권을 얻어 미국 여권을 갖고 있었으나 나인숙, 박혜자 선수는 영주권을 얻어 우리나라 외무부가 발행한 여권을 갖고 있었다.

미국 탁구의 수준은 세계 2그룹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 출신 선수들이 가세한 이후 미국은 차츰 그 전력을 끌어올렸으며, 77년 버밍엄 세계대회에서는 남녀 모두 단체전 2군에서 수위를 차지하여 세계대회 참가 20년 만에 1군으로 오르는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미국 탁구계에 첫발을 내딛은 한국의 선두주자는 이달준 씨였다. 그는 1962년 인도 폼페이에서 거행된 아시아 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의 세계적 선수 오기무라(작고)를 누르고 결승까지 올라 한국 남자 선수로서는 가장 먼저 은메달을 차지한 화제의 스타였다.

이때 얻은 명성을 발판으로 영국 프로단체와 계약, 유럽을 돌면서 시범경기를 벌이다가 1967년 탁구 불모지인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1968년부터 미국 선수권대회에 출전, 74년까지 계속 패권을 지켰으며 탁구용품 판매점과 탁구도장을 경영, 실업가로서 기반을 다졌다. 미국 여인과 결혼으로 시민권을 얻었고 후에 이혼하고 1975년 당시 서울신탁은행 탁구선수 박혜자와 재혼, 부부가 함께 미국 탁구계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미국 여자 챔피언인 나인숙은 한국이 우승했던 73년 유고 사라예보 세계대회 때 한국 대표팀의 일원이었다. 정현숙과 같은 커트 수비선수로 동덕여고, 산업은행 시절부터 같은 길을 걸은 그는 정현숙 선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고, 74년 미국에서 가발상을 경영하는 부모와 같이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75년 현지에 이민 온 인도인과 결혼했으며, 77년 버밍엄 세계대회에 미국대표로 출전, 중국의 장덕영 선수와 풀세트 접전 끝에 2대 3으로 아깝게 진 관록 있는 선수였다.

한국 출신 선수가 미국대표로 국제대회에 참가한 종목은 당시만 하더라도 탁구 하나뿐이었다. 이달준은 69년 뮌헨 세계대회 때부터 77년 사라예보 세계대회 때까지 네 차례에 걸쳐 성조기를 가슴에 달았으며 나인숙은 77년 버밍엄 대회에서 미국대표로 처음 데뷔했다.

미국탁구는 한국 출신 선수들에 의해 2그룹에서 1그룹으로 오르는 공과를 이루었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의 가슴을 치게 할지도 모를 단독 평양행에 한국계 선수를 앞세우고 갈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 빠졌다.
 

미국·중국 선례로 본 탁구외교

1949년 10월 중국정권 수립 이후 20여 년간 적대관계에 있어왔던 미·중국 관계는 닉슨대통령이 백악관에 들어가면서부터 해빙되기 시작하다가 급기야 탁구 외교로 본궤도에 진입했다. 미국은 1971년 3월 15일 탈아시아를 지향하는 미국정책의 일환으로 대 중국 포위정책을 수정, 그 첫 번째 구체적 조치로 중국에 대한 미국시민 여행 제한 조처를 철폐했다.

중국은 이와 같은 미국의 화해제스처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같은 해 4월 미국 탁구선수단을 북경에 초청했다. 중국의 미국 탁구선수단 초청은 그 해 4월초 일본의 나고야에서 개최되었던 제31회 세계선수권대회가 끝나갈 무렵 이루어졌으며 이를 수락한 미국측은 15명의 선수단과 3명의 기자단을 귀국길에 바로 중국에 파견했던 것이다.

미국선수단 일행은 4월 10일부터 17일까지 8일간 중국 상해와 북경에 머물며 중국 선수들과 여러 차례에 걸쳐 친선경기를 가졌다. 미국 탁구선수단을 맞이한 중국측의 환대는 대단했는데, 특히 당시 신설된 북경의 실내체육관에서 게임이 있는 날에는 18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체육관이 초만원을 이루기도 했다.

중국선수들은 시합의 승부보다 미·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친선 시합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에 역점을 두는 듯했다고 당시 통신들은 전했다.

미국 선수단의 중국방문이 끝나갈 무렵 당시의 중국 수상 주은래는 이례적 환대의 일환으로 인민대회장에서 미국 선수단 초청 리셉션을 베풀며 “우리는 이제 미·중국 인민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말했다.
 

주은래 중국 수상이 미국 탁구대표단을 맞아 "당신들이 미중 관계의 새로운 서장을 펴고 있다"고 말한 핑퐁외교의 현장.

주 수상의 이 발언은 이른바 ‘국가는 독립’을, ‘민족은 희망’을, ‘인민은 혁명’을 성취해야 한다는 중국의 3단계 외교전략 가운데 한 단면을 직접 지적한 것으로 각 언론은 풀이했다. 주은래 수상은 당시 미국 선수단장으로 갔던 그레이엄 스틴호번 미국 탁구협회장에게 “앞으로 중국과 미국간에 끊임없는 접촉이 있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양국 관계의 급진전을 암시하기도 했다.

스틴호번 회장은 미국에 돌아온 직후인 4월 21일, 닉슨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 대표단의 장비를 정식 서면으로 발송할 것을 승인받았다고 밝혔으며 이에 따라 중국은 1972년 4월 송중을 단장으로 하는 탁구선수단을 미국에 보내기에 이르렀다.

그 후 미국의 대 중국 접근 속도는 전격적이었다. 1971년 6월 10일, 닉슨대통령은 대중국 금수 조치를 거의 해제했고, 7월 9일~11일까지 키신저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을 북경에 밀파, 72년 2월 닉슨대통령의 중국 방문 초석을 깔았다.

탁구외교를 배경으로 해서 이루어졌던 과거 미·중국 간의 접근방식과 흡사한 당시 미국 탁구선수단의 평양탁구선수권대회 참가 결정은 당시 미국이 한반도 문제 해결방안의 하나로 남북한 간의 3자회담을 추진하고 있던 시점이어서 더욱 관심을 끌게 했다.
 

협회, 회원국 지원받아 출전 관철 추진하기로

미국 탁구팀이 평양 세계대회에 참가한다는 발표에 아직 초청장도 받지 못한 대한탁구협회는 영국에 있는 국제탁구연맹 사무국에 초청장 발송 여부를 확인하고 긴급 이사회를 소집하는 등 부산한 업무를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그해 6월 11일~12일, 일본 도쿄에서 개최하는 국제탁구연맹 이사회에 참가하는 로이 에반스 회장을 비롯한 각국 대표의 협조를 얻기 위해 천영석 협회 전무이사를 일본에 파견시켜 정확한 정보수집과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특히 협회는 ‘모든 회원국이 참가자격이 있는 세계대회라면 국제연맹 전 회원국을 초청하고 입국 비자 발급과 대회 참가 중의 자유 활동을 보증해야 한다’는 점과 ‘정당한 회원국, 더구나 우승후보 실력팀인 한국을 정치적인 이유로 제외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것’임을 주지했다. 협회는 그러한 문제들을 국제연맹 이사회에서 따진 다음 각 회원국의 지원을 받아 우리의 주장을 관철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기로 했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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