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대회 유치 경위 및 상황

당시 25억 아시아인의 영원한 전진을 다짐하는 제8회 아시아경기대회가 1978년 12월 9일부터 태국의 방콕 국립경기장에서 한국을 비롯 2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개막 12일간의 경기에 들어갔다.

아시아 경기대회 사상 최대 규모가 된 8회 대회는 직전 테헤란 대회에 이어 사상 두 번째로 각 종목에서 남북한 대결이 벌어지는 무대여서 한국뿐만 아니라 전 참가국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태국 국왕의 개회 선언으로 막을 올린 개막식에서 한국은 카타르에 이어 두 번째로 입장했다. 알파벳 순서에 의해 한국에 뒤이어 세 번째로 입장해야 했던 북한은 대회 조직위원회의 그 같은 결정에 반대, 17번째로 입장했다.
 

방콕 하늘의 태극기. 개막을 앞둔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메인스타디움 앞거리에 게양된 참가국 국기들. 우로부터 세 번째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19개 정식 종목 가운데 요트와 하키를 제외한 17개 종목에 출전, 종합 3위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최종 전력 점검을 계획대로 마치고 격전지에 다다른 한국 선수단 267명은 일제히 각 종목별로 메달획득을 향해 전진했다.

8회 대회는 당초 대회 개최지로 결정되었던 파키스탄이 이를 반납함에 따라 개최지 선정 문제와 분담금 배분, 이스라엘의 참가문제 등 제반 어려운 여건 속에서 태국이 인수, 개최했던 대회다. 태국은 제5회(1966년) 및 제6회(1970년)에 이어 세 번째로 방콕에서 아시아 경기대회를 개최했다.

세 번씩이나 아시안게임이 치러진 방콕은 한국으로선 가슴 아픈 기억이 있는 장소였다. 1966년 제5회 대회 기간 중 소집된 아시아 경기연맹(AGF) 총회에서 1970년 제6회 대회를 한국이 유치한다고 하여 전 체육인들의 꿈이 부풀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1년 후 국내 재정 및 여러 여건이 여의치 못해 결국 많은 분담금을 보태며 유치를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대회 역시 태국이 인수하여 방콕에서 경기를 치렀다.

한국 선수단, 그중에서도 특히 탁구인들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 6회 대회에서 탁구가 정식종목에서 제외되는 수난을 겪은 까닭이었다. 사연인즉, 같은 방콕에서 치러진 5회 대회에서 우리 김충용 선수가 개인단식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이변을 일으켰다는 데 있었다. 대회의 전 종목을 통틀어 마지막으로 결정된 이 금메달로 인해 한국은 극적으로 종합 2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개최국인 태국이었다. 이전까지 한국보다 1개 많은 금메달 수로 종합 2위를 확신하고 있었던 태국은 김충용 선수의 금메달로 동수가 되자 은메달 수에서 밀리며 결국 종합 3위로 내려앉고 만 것이다. 이 같은 사건(?)에 대한 앙갚음으로 태국은 6회 대회에서 탁구종목을 빼는 조건으로 유치했다. 결국 탁구는 아시안게임에 다시 나서기 위해 오랜 공백 기간을 겪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안타까운 일을 탁구인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어쨌든 태국은 5회와 6회에 이어 세 번째로 8회 아시아 경기대회를 열었다. 말하자면 태국으로서는 제5회 대회만 자발적으로 유치한 것이고, 6회와 8회 두 대회는 타국가가 유치해 놓고 개최불능으로 반납한 대회를 많은 분담금을 받아 유치한 셈이었다.

사연이야 어쨌건 대규모 대회를 세 번씩이나 열게 된 태국조직위원회는 8회 대회에서 특히 이스라엘 참가 문제로 AGF 임시총회를 소집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태국은 과거 2회에 걸친 성공적인 개최 경험을 살려 별 무리 없이 순조로운 대회를 이끌어냈다.

1974년 제7회 대회부터 참가한 중국, 북한 및 아랍제국의 특수한 결속의 양상은 아시아 경기대회의 성격을 크게 변질시켰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오염의 도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그 한 예로 당시까지 30여년의 전통을 이어온 아시아 경기연맹(AGF)을 유명무실하게 했으며 새로운 기구로 아시아 스포츠 최고회의를 창설하게 된 것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기구의 창립은 아시아 스포츠를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제기되었다고는 하지만, AGF의 기존 회원국인 이스라엘을 축출하고 중국, 북한 및 아랍국을 주축으로 한 아시아 스포츠 세계의 새로운 정점을 시도한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경기적인 측면에서 상위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스포츠 외교적인 면에서 아시아 스포츠 무대에서의 지위를 확고히 펴 나가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방콕 제8회 대회에 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같은 부담을 안고 출전한 한국은 각 종목별로 정진한 결과 종합 성적으로는 일본과 중국에 이어 당초 목표한 종합성적 3위를 차지하여 북한을 앞섰다. 금메달 총 획득수로 볼 때에는 한국 18개에 북한 15개였다. 북한의 아시아대회 참가 방향은 메달이 많은 개인종목에 집중적으로 주력하는 시책으로서 한국 타도를 겨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은 예상 외 종목에서 선전함으로써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둘 수 있었고, 여기에 이란의 불참은 한국에 더욱 유리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제8회 방콕 아시안 게임 참가국별 메달 획득 집계표

국가/메달

국가/메달

일본

70

59

49

187

싱가포르

2

1

4

7

중국

51

54

48

153

말레이시아

2

1

3

6

한국

18

20

31

69

몽고

1

3

5

9

북한

15

13

15

43

레바논

1

1

0

2

태국

11

12

19

42

시리아

1

0

0

1

인도

11

11

6

28

미얀마

0

3

3

6

인도네시아

8

7

18

33

홍콩

0

2

2

4

파키스탄

4

4

9

17

스리랑카

0

0

2

2

필리핀

4

4

6

14

쿠웨이트

0

0

1

1

이라크

2

4

6

12

합계

201

199

227

627

제8회 방콕 아시안 게임 한국과 북한의 메달 획득 실적

종목/등위수

한국

북한

종목/등위수

한국

북한

1

2

3

1

2

3

1

2

3

1

2

3

육상

 

1

1

2

2

4

배드민턴

 

2

 

 

 

 

수영

 

 

3

 

 

 

탁구

 

1

4

 

 

1

싸이클

2

2

1

 

 

 

체조

 

1

3

2

1

2

사격

1

6

8

6

5

1

볼링

1

 

2

 

 

 

레슬링

1

2

3

 

 

1

남자배구

1

 

 

 

 

 

복싱

5

1

3

1

2

1

여자배구

 

1

 

 

 

 

역도

1

1

3

2

3

 

남자농구

 

 

 

 

 

1

펜싱

1

1

3

 

 

 

여자농구

 

1

 

 

 

 

궁도

1

1

 

 

 

2

축구

1

 

 

1

 

 

테니스

2

1

 

 

 

 

합계

18

20

31

15

13

15


탁구경기 결과 및 북한 여자탁구팀 불참

한국 남자 탁구팀은 단체경기 조편성에서 B그룹에 속해 첫 경기를 일본과 갖게 되었으며 6개국이 출전, 풀리그로 벌이는 여자부도 첫날 세계 최강 중국과 맞붙게 되었다.

남자단체전 결과는 첫 경기에서 일본에 0대 5로 완패하고 말레이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에게 5대 0, 태국과의 경기에서 5대 1로 승리했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인도네시아에게 4대 5로 패하는 바람에 B조 3위로 쳐져 준결승전 진출에 실패했다. A조 3위인 홍콩과의 5,6위전에서 5대 0으로 승리한 한국은 결국 목표보다 저조한 5위에 머무르고 말았으며, 이로써 예상되었던 남북대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1위 중국, 2위 일본, 3위 북한).

한편 여자단체전에서는 첫날 경기에서 중국과 대전했으나 역부족으로 0대 3으로 완패했으나 홍콩, 네팔, 태국, 말레이시아, 일본에게는 3대 0의 일방적인 승리를 거둬 5승 1패로 준우승에 올랐다. 특히 우려했던 일본과의 경기에서 김순옥과 이기원이 강호 지바, 나가하라를 차례로 2대 0으로 물리친 뒤, 복식 역시 2대 1로 승리함으로써 은메달을 차지했다(1위 중국, 2위 한국, 3위 일본).
 

여자단체전에서 강호 일본을 꺾고 은메달을 확보한 한국의 임원과 선수들이 서로 손을 잡고 기뻐하고 있다.

개인전에서는 여자단식에서 김순옥 선수가 준결승전까지 진출, 중국의 장립 선수와 대전했으나 0대 3으로 패해 동메달에 그쳤으며, 혼합복식 준결승전에서 이상국·이기원 조가 중국의 리앙케·리앙창데잉 조에게 0대 3으로 패해 역시 동메달을 차지했다. 혼합복식 윤길중·김순옥 조가 남자복식 박이희·윤길중 조도 준결승까지 진출, 중국과의 대전을 앞두었으나 윤길중 선수의 복통으로 인해 게임을 기권하여 두 종목 모두 3위에 머물렀다.

한편 여자탁구 개인단식 세계챔피언 박영순을 보유하고 있던 북한은 뜻밖에도 이 대회에 불참했다. 북한의 불참에 대해 탁구 전문가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간가는 표현을 했다. 아시안게임 직전인 11월 27일부터 12월 2일까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개최된 제4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도 참가했던 북한은 이후 바로 귀국, 아시안게임에 불참하는 납득하기 힘든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아시아의 많은 탁구전문가들은 북한 여자탁구가 당시 대회에 출전을 포기한 것은 한국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만약 그들이 한국팀에 패한다면 그 이듬해 개최되는 평양 세계대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북한 여자 탁구는 최소한 단체전에서는 한국에 승산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 선수단의 감독 문희수는 북한 여자 탁구선수단의 불참은 긴 여행으로 피로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맞지 않는 대답으로 변명했다 한다. 그러나 스포츠는 승패에 관계없이 참가에 의의가 있다고 했는데 좋은 조건의 아시아 대축제를 마다하고 귀국해버린 같은 민족 북한 여자 탁구팀의 동정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 체육계, 거센 중국바람

8회 대회에서 또 하나 특기할 점은 이전까지 일본에 의해 주도되던 아시아의 스포츠 판도가 대회 종료와 함께 중국의 손에 넘어갈 징후가 뚜렷이 엿보였다는 점이었다.

1974년 테헤란 대회 때부터 아시안게임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중국 스포츠는 두 번째 출전한 제8회 대회 각 종목에서 놀라운 수준을 선보였다. 탁월한 기량을 보여줬던 탁구에서만도 전체 7개 종목 모두를 석권했을 뿐만 아니라 은 3, 동 2개도 완전 독점했다.

중국 탁구팀은 방콕 아시안게임 직전에 열린 제4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서도 5개 종목을 석권하고 남자복식과 여자복식에서만 우승을 북한에 넘겨준바 있었다.

이른바 ‘죽의 장막’이라고 불렸던 미지의 베일 저편에 거대한 모습으로 도사리고 있던 중국의 스포츠, 그것은 사실 아시안게임이라는 공개적인 무대에 등장하기 전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왔다. 광대무변의 영토, 당시 9억이란 인적 자원의 기본적 여건 자체가 벌써부터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 스포츠는 4년 전 테헤란에 처음으로 등장, 다소 촌스러움을 내포하긴 했어도 가볍게 일본, 이란에 이어 종합 3위를 차지하는 저력을 보인 다음 이번에는 전 종목에서 훨씬 달라진 면모를 과시했다. 중국은 19개 종목 가운데 볼링, 복싱, 하키, 요트 등 4개 종목을 제외한 15개 종목에 선수단을 참가시켰다. 테헤란 대회에서 중국이 따낸 금메달은 일본의 75개에 절반도 되지 않는 33개였으나, 4년 만에 치러진 방콕 대회에서는 금메달 51개로 70개인 일본을 바짝 추격했다.

그 뿐만 아니라 중국은 테헤란 대회 때는 우의와 친선을 심는 정치적인 자세에 역점을 두었으나, 방콕 대회 때는 지난날의 우호 스포츠에서 승리의 스포츠로 급선회하여 초반부터 일본과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였다.

중국은 국가체육위원회 주최로 체육 공학회의 요령을 실시, 장기적으로 88년 올림픽을 대비하여 전국에서 세계 정상급 운동선수를 발굴, 육성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탁구를 위시한 각 종목의 해외 원정을 자주 실시, 스포츠 선진국의 기술을 빠른 시일 안으로 배우게 했다. 그들은 각 종목별로 작은 국제 대회까지 조사단을 파견시켜 경기 모습을 필름에 담아가는 등 진지한 연구태도를 계속했다.

8회 아시안게임에서도 가장 많은 80명의 보도진을 파견한 중국은 전원이 카메라와 테이프 레코더를 들고 다니면서 취재보다 상대팀 전력 탐색에 열을 올렸다.

중국 스포츠가 보여준 또 하나의 장점은 끊임없는 스포츠 용구의 개발이었다. 탁구 이질 러버 개발은 말할 것도 없고 테니스, 자전거, 수영복, 체조용구 등은 당시에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용구를 자체 생산할 정도로 스포츠 용구 사업이 크게 발전, 자급자족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러한 중국 스포츠의 미래가 더없이 빠른 발전을 이룰 것이라는 예상은 당연한 것이었다.

중국은 당시에 이미 아시안게임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세계무대에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또 외교술의 하나로 동서를 불문한 세계의 스포츠 선진국에 그들의 선수를 끊임없이 참가시키고 있었다.

현재 중국의 스포츠는 이미 아시아권을 넘어서 세계 정상에 서있다. 중국 스포츠의 빠른 성장에는 그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함께 작용했던 것이다. 대다수 종목에서 중국을 따라잡기가 요원해진 한국에게 그 같은 중국의 자세는 참으로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일이라 하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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