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장이머우 VS 천카이거

1966년부터 약 10년간 일어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대중을 독재자에게 더 철저히 구속하려 했던 일종의 인간 정신 개조운동이었다.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예술인, 지식인들은 철저히 탄압받았고, 각종 도서, 유물, 예술작품 등은 처참하게 파괴됐다. 특히 영화는 국가선전도구로서의 기능만 요구받던 시기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폭풍이 가라앉고, 폐쇄되었던 베이징영화학교가 다시 문을 열면서 이곳 출신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와 현실, 사람들과 사회에 관한 영화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영화들을 제5세대 영화라고 부르는데 그 선봉장에 섰던 영화감독이 바로 장이머우와 천카이거였다.

 

장이머우와 천카이거

 

장이머우, 시각적 요소를 극대화하며 영상미를 강조한다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는 장이머우는 국민 당원이었던 부친 때문에 문화대혁명의 철퇴를 맞고 농촌으로 쫓겨나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특히 예술과 촬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피를 팔아 카메라를 사들일 정도로 열성적이었지만 문화대혁명 기간에 그에게 허락된 것은 정신개조 교육을 받으며 공장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문화대혁명의 시대가 끝나고 베이징영화학교가 다시 문을 연다는 소식에 입학시험에 응시, 높은 점수로 시험을 통과한다. 그럼에도 27살이라는 많은 나이 때문에 입학을 거절당하자 40개가 넘는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10년을 허비했다는 요지의 편지를 문화부 장관에서 보내는 적극성을 보이며 결국 입학을 허가받게 된다.

졸업 후 본격적으로 영화판에 뛰어든 장이머우의 첫 감독작은 <붉은 수수밭(1988)>이라는 작품이다. 20세기 초반의 농촌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한 여성의 인생을 통해 중국인의 삶 속에 녹아 있는 가부장제, 봉건주의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여성의 해방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독특하고 아름다운 화면 구성과 컬러 필터를 통한 화려한 색감 표현으로 시각적인 요소를 극대화했다는 평을 받으며 중국 영화 최초로 베를린영화제의 대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진을 먼저 시작했고 촬영으로 영화를 시작했던 만큼 장이머우의 영화는 특유의 색채미와 화면구도가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이후 만들어진 <국두(1990)>, <홍등(1992)>, <귀주 이야기(1992)> 등을 통해 그만의 아름다운 영상미를 선보이며 가장 아름답고 중국적인 화면으로 중국 영화를 세계화했다는 찬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장이머우의 영화가 그저 시각적인 아름다움만 추구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그의 영화들은 그 어떤 감독의 영화들보다 중국 현실과 역사, 전통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 특히 그의 초기 작품들은 사회주의의 탈을 쓴 중국 봉건전통을 비판하고 있으며, 중국 농촌 사람들에 대해 깊은 연민과 애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극치의 영상미를 보여준 <영웅>.

이후 장이머우는 세계적인 찬사를 받으며 <인생(1994)>, <영웅(2002)>, <황후화(2006)> 등의 영화를 만들어 갔고 1997년에는 이탈리아 피렌체 극장을 시작으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연출을 맡아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시각적 탐미주의와 연출력을 인정받으며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폐막식의 총감독을 맡기도 했는데 어마어마한 스케일과 상상을 초월하는 기획력을 선보이며 ‘빛과 색, 소리가 빚어낸 중국 역사의 향연이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천카이거, 중국의 근현대사 속 상징적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천카이거는 영화감독인 부친과 시나리오 작가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천카이거에게도 중학교 재학 중에 일어난 문화대혁명은 아픈 상처를 남겼다. 홍위병이 되어 공산당원이 아니었던 아버지를 대중들 앞에서 열렬히 비판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윈난 성으로 보내져 벌목과 군인생활을 하다가 베이징에 돌아와 3년 동안 필름노동자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베이징영화학교의 감독과에 입학, 본격적인 영화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졸업 후 몇몇 영화제작소에서 조연출을 하던 천카이거는 첫 작품으로 <황토지(1984)>를 만들어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은표범상을 수상, 유럽 영화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카 란의 소설 <심곡회성>을 원작으로 한 영화 <황토지>는 황하 상류 연안의 황량한 대지를 배경으로 전통과 혁명, 지식인과 민중, 인간과 토지 사이의 관계를 새로운 형식과 독특한 영상으로 보여준다. 특히 이 영화는 중국 제5세대 영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이정표와 같은 영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중국의 아픈 근현대사를 그려낸 <패왕별희>.

천카이거 초기 영화들에는 문화대혁명의 경험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데 <황토지>는 물론 인민해방군 병사들을 다룬 <대열병(1985)>, 한 교사를 통해 중국 사회주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해자왕(1987)> 등의 작품은 그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진다. 그뿐만 아니라 천카이거의 대표작 중 하나인 <패왕별희(1993)>는 동성애와 중국전통 경극을 소재로 중일전쟁, 국민당 정권 성립과 몰락, 공산당의 해방, 문화대혁명에까지 이르는 중국의 근현대사를 다루면서 칸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천카이거는 영화 속에서 중국의 부조리를 다룬다는 이유로 중국 당국으로부터는 많은 압박을 받은 영화감독이다. 그의 첫 영화였던 <황토지>는 반동영화로 찍혀 두 번 다시 영화를 만들지 못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고 수많은 상을 받았던 <패왕별희>는 중국에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후 만들어진 <시황제암살(1998)>, <투게더(2003)>, <무극(2005)> 등의 영화를 보면 점점 상업적인 면에 치중한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그의 첫 영화 <황토지>를 만들었을 무렵만 해도 중국에서는 돈을 내고 영화를 본다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한편으로는 매우 아이러니하다.

 

두 영화감독의 라이벌십, 관객은 즐겁다

장이머우와 천카이거는 78학번의 베이징영화학교 동문이다. 전공은 달라서 장이머우는 촬영, 천카이거는 연출을 공부했지만, 졸업 후 같은 영화사에서 일하면서 천카이거의 첫 연출작인 <황토지>를 함께 만들었다.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며 극찬을 받았지만, 감독 천카이거와 촬영감독 장이머우가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학창시절부터 쌓아온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장이머우는 화면을 아름답게 구상하는 일에 골몰했고, 천카이거는 주인공의 내면을 화면에 어떻게 옮길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포스터를 만들 때조차 어떤 색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갈등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게다가 <황토지>의 성공이 가져온 찬사가 천카이거에게만 쏟아지는 것도 장이머우로서는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두 번째 영화인 <대열병(1985)>을 끝으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다. 그리고 장이머우는 천카이거의 촬영감독으로 일하는 동안 억눌러야 했던 영상미에 대한 욕구를 감독 데뷔작인 <붉은 수수밭>을 통해 마음껏 발현하게 된다.

 

 

이후 두 감독은 경쟁하듯 연이어 영화를 선보이는데 특히 천카이거의 <패왕별희>와 장이머우의 <인생>이 1년의 시간차를 두고 개봉됐을 때는 서로의 작품에 대해 “<패왕별희>는 서민에게 어려운 메시지를 담아 잘난 체를 하고 있다”, “<인생>은 서민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다뤄 대중의 인기에 편승하려 한다”며 혹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경쟁심이 가장 뜨거웠을 때는 진시황이라는 인물을 다르게 해석한 영화 <시황제 암살(1998)>과 <영웅(2002)>이 발표되었을 때가 아닌가 싶다. 먼저 영화를 발표한 천카이거는 진시황을 폭군으로 묘사했고 장이머우는 그를 영웅으로 묘사하며 완전히 반대되는 시각을 제시했다. 천카이거는 장이머우의 <영웅> 제작 소식을 듣고 자신의 영화 <시황제암살>이 장이머우의 <영웅>보다 훨씬 낫다고 말했지만 <영웅>은 흥행 면에서도 가볍게 <시황제암살>을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외국어 작품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여배우 궁리와의 관계다. <붉은 수수밭>으로 궁리를 스타로 만든 장이머우는 그녀와의 불륜이 밝혀지면서 가정은 파경을 맞았고, 이후 천카이거는 장이머우의 여러 작품을 통해 스타가 된 궁리를 자신의 작품에 캐스팅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쌓아가기도 했다. 결국, 궁리는 사업가와 갑작스러운 결혼을 하면서 이 두 사람의 사이에 불편한 존재가 되는 일에는 안녕을 고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매우 깊이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쟁적으로 발표하는 두 사람의 영화들을 살펴보다 보면 상대방의 화면 기법을 모방하거나 자극받으며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본인들이야 어떻든 이런 두 사람의 라이벌십을 바라보는 영화팬의 입장은 즐겁다. 현재도 진행 중인 두 영화감독의 경쟁. 그들이 만들어낼 무궁무진한 영화의 세계가 진심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월간탁구 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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