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 이야기

올해 극장가의 최대 흥행작은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명량>이었다. 최단기간 천만 관객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개봉한 지 두 달이 넘은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얼마 전 영화 속 등장인물인 배설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욕되게 했다며 영화사에 소송을 제기하는 일이 있었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조상에게 이순신 살해미수 혐의를 씌워버린 영화 제작사측에 ‘영화적 허구와 상상’이라는 말로 면죄부를 주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더군다나 우리에게 잘못된 역사 상식을 갖게 만든 것들이 알고 보면 매우 사소한 것들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의자왕에게 정말 삼천궁녀가 있었을까

 ▲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시대 금관 장식.

우리 역사 속 최대의 난봉꾼으로 손꼽히는 사람은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이다. 의자왕이 정사를 멀리하고 삼천 명이나 되는 아름다운 궁녀들을 가까이하며 방탕하게 살다가 나라까지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는 이야기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활약했다는 사실만큼이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백제의 몇 배나 되는 국력을 가지고 있던 조선의 궁녀조차 태종 때는 수십 명에 불과했고 17세기 후반에 와서야 6백여 명 정도로 불어났다는 점, 백제 멸망 당시 수도인 사비성의 인구수가 5만 명에 불과했다는 점만 봐도 삼천궁녀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도대체 삼천궁녀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사실 삼천궁녀라는 말은 뜻밖에도 중국의 문호 백거이의 ‘장한가’라는 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조선 시대 선비들이 중국 문인들의 글귀를 인용하며 자신들의 유식함을 뽐내던 유행에 따라 15세기 후반에 ‘김흔’이라는 사람이 낙화암과 삼천궁녀를 관련시킨 시를 쓴다. 그 후부터 삼천궁녀에 대한 기록이 종종 눈에 띄고 있으나 선례에 따라 문학작품에서나 사용되던 상징적 표현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의자왕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도 우리가 흔히 들어 알고 있던 기존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많다. 특히 왕에게 붙는 존칭이 생전에 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 만들어지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롭고 자애로운 왕’이란 뜻의 ‘의자(義慈)왕’이라는 호칭이 주색에 빠져 나라를 멸망케 한 왕에게 붙여졌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힘들다.

 

집현전 학사들은 훈민정음을 반대했다

▲ 세종대왕.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든 것으로 배워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실록에는 ‘1443년 12월 임금이 직접 언문 28자를 만들었다. 글자는 간단하고 쉬우나 변화가 무궁하다. 이를 훈민정음이라 이른다’고 적혀있다. 즉 한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공동 연구 결과가 아닌 세종대왕 혼자만의 업적인 것이다.

오히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린 주동자들이 바로 집현전 학자들이었다. 집현전 최고 책임자였던 최만리조차도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상소를 통해 훈민정음 창제가 세종대왕의 독단적인 행동이라며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어찌 옛날부터 쓰는 폐해 없는 글자를 고쳐 따로 낮고, 천하고, 속된 말인 이익이 없는 글자를 새로 만들어 쓰겠습니까’라며 훈민정음을 깎아내렸다. 이에 해동잡록이라는 책을 보면 세종이 눈물을 흘리며 ‘집현전 여러 선비들이 나를 버리고 갔으니 어쩌면 좋겠는가’라며 황희에게 하소연을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집현전 학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보수적이고 극심한 반대의견을 내세웠던 나이 든 학자들을 제외한 젊은 학자들에게 한글 창제의 원리와 설명을 상세하게 기술한 해례본을 만들게 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하나 세종대왕의 꼼꼼한 지시에 따른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 훈민정음 언해본(좌)와 해례본(우).

 

네로는 로마를 불태우지 않았다

어쩐지 우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보다 ‘폭군’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로마의 황제였던 네로처럼 말이다. 사실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는 것만으로도 네로는 희대의 패륜아에 폭군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였던 아그리피나가 황제인 남편을 암살한 후, 어릴 때부터 숙모에게 맡겨놨던 16살의 네로를 황제 자리에 앉히고, 다시 몇 년 후엔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네로를 제거하고 자신의 정부를 황제로 내세우려던 권력욕에 사로잡힌 악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 로마의 네로 황제는 황제보다는 예술가가 되길 원한 사람이었다.

특히 그에게 폭군과 광기의 이미지를 덧입히게 된 사건인 ‘로마 대화재’ 방화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당시 로마 역사가들의 저술엔 어디에도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서술은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정치적으로 반 네로파 성향을 보였던 수에토니우스가 ‘네로가 불타는 로마를 내려다보며 하프를 타고 시를 읊었다더라’라며 항간의 소문을 기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립파였던 타키투스는 그러한 루머에 강한 불신을 나타내며 로마가 불에 탈 당시 네로는 80km나 떨어진 별장에 머물러 있다가 화재 소식에 진화를 위해 급하게 로마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로마 대화재 후 네로가 취한 행동은 그의 정치 인생 중 최고의 업적이라고 평가될 정도다. 불길을 잡기 위해 필사적인 진화, 구조 작업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황제 개인 재산까지 털어 집을 잃은 20만 이재민에게 임시거처와 생필품을 공급했으며, 이후 재발방지를 위해 소방 시스템을 구축하고 건축 재료를 불에 강한 돌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다고 하니 말이다. 특히 로마 대화재로 그의 귀중한 수집품들과 아끼던 건축물인 막시무스 경기장, 완공을 앞두고 있던 새 궁전 도무스 트란지토리아까지 잃어버린 점만 봐도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인터넷과 SNS가 생겨나고 빛보다 빠른 속도로 뉴스가 전달되는 21세기에도 속설, 소문, 전설과 같은 것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들이 조금만 생각하면 커다란 오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보면 ‘카더라’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 같다. 특히 요즘과 같이 뉴스와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엔 무엇보다 진실을 알려고 하는 의지와 바른 판단이 그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월간탁구 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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