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33) / 전대호

매우 낯설었던 ‘혁신’
  얼마 전 막을 내린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혁신은 VAR, 곧 ‘비디오 보조 심판(Video Assistant Referee)’의 도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글의 목적은 그 혁신을 철학적으로 성찰해보는 것이다.
  늦은 밤에 무척 긴장하면서 축구경기를 시청한 분들이 꽤 많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우리나라 팀이 스웨덴과 맞선 첫 경기. 비록 우리 팀의 실력이 미덥지는 않았지만, 축구라는 경기는 기본적으로 단체전이어서 그런지 수많은 관중과 시청자를 하나로 통합하는 힘이 늘 강력하다. 더구나 국가대표 대항전은 애국심과 민족의식까지 부추기니, 스웨덴 팀과 우리 팀이 팽팽한 균형을 이뤘던 전반 15분 정도까지의 경기 상황에 몰입하지 않은 한국인은 아마 드물 것이다. 필자 역시 오랜만에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축구경기를 시청했다. 우리 팀이 이길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부풀리면서.
  그러던 중에 우리 진영 페널티 박스 안에서 수비수가 태클로 공을 쳐냈고, 스웨덴 선수들은 반칙이라며 손짓했지만, 심판은 경기를 속행했다. 텔레비전 중계 화면은 수비수의 등을 비춰주었으므로, 필자를 비롯한 시청자들은 공과 수비수의 발과 공격수의 발이 정확히 어떻게 만나고 엉켰는지 볼 수 없었다. 마침 심판도 그 각도로 상황을 지켜보는 바람에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 아직도 미련 남는 문제의 그 장면! 방송 화면 갈무리.

  그런데 몇 십 초 후 맥없이 경기가 중단됐다. 방금 전 태클 상황에 대해서 이른바 VAR 판독이 필요하다는 보조심판의 건의를 심판이 뒤늦게 받아들인 탓이었다. 필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매우 낯선 일이었을 것이다. 축구에서는 반칙이 일어나거나 공이 바깥으로 나가서 어쩔 수 없이 경기가 중단되더라도 곧바로 속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선수가 심하게 다쳤을 경우에도 경기의 속행을 위해 선수를 바깥으로 옮겨서 치료해야 한다. 필자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흐름과 연속이 생명인 축구 경기가 이런 식으로 되다니…….
  야구에서 비디오 판독을 위해 경기가 중단되는 것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 애당초 야구는 경기의 진행이 자주 끊기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야구 경기의 총 시간 중에서 인플레이 시간은 아마 3분의 2보다 적을 것이다. 나머지 시간은 경기가 중단된 상태에서 지나가는 시간, 예컨대 공수 교대 시간, 타자와 투수의 준비 시간, 감독과 배터리가 상의하는 시간 등이다. 그래서 야구는 텔레비전 방송에 딱 적합한 스포츠라는 이야기도 있다. 방송 중간 중간에 광고를 집어넣을 여지가 충분히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축구는 사뭇 다르다. 놀이의 성격보다 싸움의 성격이 얼마나 더 강하냐를 기준으로 스포츠 종목들을 나열한다면, 축구는 중간보다 훨씬 더 앞에 놓여야 마땅하다. 다들 해봐서 알겠지만, 축구를 하다보면 정강이, 어깨, 머리가 숱하게 부딪힐 뿐더러, 축구화 바닥에 발목이 찍히고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관절을 다쳐 신음하는 일마저 종종 벌어진다. 더구나 축구는 보통 싸움도 아니라 패싸움이다. 만약에 축구가 아이스하키 스틱 같은 장비를 사용하는 종목이었다면, 축구선수들도 아이스하키선수들처럼 온갖 보호용구로 온몸을 감싸야 했을 것이다.
  그런 축구에서 비디오 판독을 위해 경기의 흐름을 끊는다고? 필자는 상당한 불만과 함께 철학적 숙고의 필요성을 느꼈다. 본디 싸움은 중단 없이 끝까지 가는 것이 순리다. 싸움의 성격에 충실하려면, 스포츠 경기를 중간에 끊는 것은 되도록 삼가야 한다. 물론 격투기 종목들에서도 경기가 중단되곤 하는데, 그건 도리어 경기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거나 당장 눈앞에서 벌어진 반칙을 곧바로 처벌하기 위해서다. 몇 십초 전의 반칙을 뒤늦게 판정하겠다고 경기를 끊는 일은 없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면서 스포츠로 승화된 싸움 자체를 즐기던 때가 엊그제가 아닌가!

스포츠는 싸움과 재판 사이에 낀 중간자
  그리하여 필자는 스포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새삼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스포츠란 싸움이요 놀이일 뿐더러 또한 재판이기도 하다는 새로운 통찰에 이르렀다. 재판은 옳고 그름을 따져 승부를 가리는 활동이다. 승부를 가린다는 점에서는 싸움이나 스포츠와 다를 바 없지만, 재판은 정의를 추구한다는 점, 바꿔 말해 억울함을 없애려 애쓴다는 점에서 싸움과는 사뭇 다르고 스포츠와도 꽤 다르다. 싸움을 하면서 억울함을 운운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아무 생각 없이 후려치고 들이받고 메다꽂고 조르고 꺾고 뭉개면 그만이다. 반대로 재판정에서는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 재판에서 맞선 양편은 각자의 억울함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입증하면서 정의로운 판결을 요청해야 한다.
  이런 정의의 차원을 추가로 고려하자 스포츠의 중간자적 성격이 하나 더 포착됐다. 스포츠가 한편으로 싸움이고 다른 한편으로 놀이라는 점, 바꿔 말해 스포츠는 싸움과 놀이 사이에 낀 중간자라는 점은 필자가 이미 여러 번 강조해온 바다. 하지만 스포츠는 또 다른 의미에서도 중간자다. 즉, 스포츠는 한편으로 싸움이요 다른 한편으로 재판이다. 스포츠는 싸움과 재판 사이에 낀 중간자다. 적어도 2018 러시아 월드컵의 VAR 도입은 스포츠가 싸움과 놀이의 성격뿐 아니라 재판의 성격도 띰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 VAR 도입은 분명 혁신이다. 하지만 숱한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스포츠가 놀이와 싸움의 성격을 주로 띠고 재판의 성격은 되도록 덜 띠기를 바란다. 원래 스포츠는 함께 즐기자고 하는 활동이 아닌가. 굳이 흘러가는 시간마저 멈춰놓고 동영상 증거를 살펴보며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겠는가? 실제로 VAR이 도입됐으니, 대세는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 셈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축구와 관련해서 억울함을 느낀 사람들, 다시는 억울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무척 많음을 의미한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기에 동영상 증거까지 되짚어서 억울함을 없애자고 할까? 선수들이 그렇게 주장할 것 같지는 않다. 한 판의 경기는 한 판의 경기일 뿐이니까. 반면에 경기 결과에 큰돈을 건 도박사들은 정색하면서 비디오를 틀어보자고 할 것 같다. 자고로 법정다툼의 절대다수는 돈 문제로 일어나지 않는가.
  오늘날 스포츠는 싸움과 놀이의 성격에 더해서 재판의 성격도 띨 수밖에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이 마지막 성격은 매우 조심스럽게 최소한으로 띠는 것이 바람직할 성싶다. 순간적인 스피드로 테이블을 스치는 ‘에지’ 같은 상황을 두고 자주 시비가 벌어지는 탁구의 경우는 또 어떨까? 심판과 판정에 대한, 즉 재판에 대한 얘기는 적어도 스포츠에서는 아직도 숱한 논란의 여지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미완성의 VAR이 월드컵이 끝난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되고 있는 것처럼. (월간탁구 2018년 8월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글_전대호(시인, 번역가,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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