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32) / 전대호

탁구는 정치적 스포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숱한 명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필자는 이 문장을 대겠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그리고 탁구철학 칼럼을 쓰는 사람답게 “탁구는 정치적 스포츠다.”라는 문장을 덧붙이겠다. 물론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 아니라 필자의 창작이다.
  벌써 많은 분이 고개를 끄덕이리라 예상하지만, 탁구가 정치적 스포츠라는 것은 역사를 통해 공인된 사실이다. 그 유명한 ‘핑퐁외교’를 생각해보라. 1971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중국과 미국이 참가했다. 대회가 끝난 후 4월에 중국은 그 대회에 참석한 미국 대표단 15명을 베이징으로 공식 초청했다. 그것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였던 미국과 중국이 수교하는 대격변의 물꼬를 튼 사건이었다. 작고 가볍기 이를 데 없는 탁구공 하나가 오고 감으로써 영영 공고할 것 같던 냉전의 얼음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거의 50년이 흐른 지금, 다시 한 번 탁구는 냉전 시대의 마지막 잔재로 남은 이 한반도의 남북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장한 과업의 선봉에 나서고 있다. 지난달(2018년 6월)  23일에는 스위스 로잔에서 남북과 중국, 일본이 참가하는 친선 탁구대회가 열렸다. 이번에도 배경에 정치가 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지난달(2018년 6월) 에 또 한 번 매우 ‘정치적인’ 탁구 이벤트가 열렸다. 남북중일 친선교류전! 사진은 경기 전 기념촬영인 듯. 가운데가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으로 이제 막 물꼬를 튼 한반도 정세 변화의 최종 귀착점이 어디일지 정확히 예견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필자는 동해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일출을 기다릴 때처럼 마음이 몹시 설렌다. 어느새 골동품처럼 느껴지는 ‘동포’라는 단어를 다시 꺼내들고 싶다. 온 동포가 맑고 고운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남북 적대관계 때문에 지독한 고생을 하고 인생을 망치고 심지어 목숨을 잃은 사람을 주변에 두지 않은 동포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 엄혹한 질곡에서 벗어날 가망이 지금 심상치 않게 밝아오는데, 어느 누가 설레지 않겠는가!
  그러나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필자는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탁구공의 모습으로 상상해본다. 제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철학자라도 정치에 참여하고 역사적 사건에 감격하고 임박한 평화에 마음이 설렐 때는 일개 동포일 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철학자는 애써 평상심을 되찾으면서(혹은 가장하면서) 요리조리 따져볼 만한 이야깃거리를 찾아낸다. 이를테면 ‘왜 사람들은 심각한 정치적 대결을 해소할 때 흔히 탁구를 앞세울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이것이 꼭 필요한 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질문과 필자의 대답이 나름대로 흥미롭기를 바랄 따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철학만큼 쓸모없는 일은 없다.”라고 말했다. 곧이어 “그러나 철학만큼 고귀한 일도 없다.”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탁구의 마술에 경의를!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은, 인간이 반드시 인간관계 속에서 산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정치란 본질적으로 분쟁의 조정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인간관계는 사실상 늘 갈등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우리는 항상 상대방과 맞선다. 그 맞섬, 그 분쟁이 격한 행동으로 폭발하면, 폭력적인 싸움이 나고 급기야 전쟁도 터질 것이다. 반대로 맞선 양편이 차분히 대화하면서 합리적인 타협을 추구한다면, 그것이 바로 정치다. 폭력적으로 싸우는 양편은 거리 없이 뒤엉켜 주먹을 주고받는다면, 정치적으로 싸우는 양편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말을 주고받는다. 요컨대 중간에 테이블이 있고, 그 위로 가볍고 날렵하게 말이 오간다.
  중간에 테이블이 있고 그 위로 무언가가 날렵하게 오간다고? 이것은 바로 탁구가 아닌가! 50년 전 핑퐁외교의 주역들과 현재 남북 화해를 주도하는 정치인들이 이 사실을 의식하든 말든, 탁구와 정치는 아주 가까운 친척이다. 이 칼럼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스포츠는 한편으로 싸움이고 다른 한편으로 놀이다. 그런데 탁구는 싸움의 성격을 가장 문명적으로 승화한 종목, 그래서 놀이의 성격을 가장 많이 띤 종목으로 꼽을 만하다. 그래서 탁구는 정치적이다. 정치란 다름 아니라 문명화된 싸움이니까 말이다.
  어려운 얘기 할 필요 없이, 간단히 상상해보자. 1971년에 중국과 미국의 화해를 위해 친선 유도 경기가 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성실한 중국 선수들이 시차 적응도 채 안 된 미국 선수들을 메다꽂고 가슴팍을 짓누르고 목을 조르고 팔을 꺾어버렸다고 해보자. 필시 그 ‘유도외교’의 결과는 적대관계의 심화였을 것이다. 어쩌면 전쟁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중국과 미국의 수교를 추구하는 정치인들이 베이징의 어느 무도회장에서 모여 사교댄스 파티를 열 계획을 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필시 그 무도회장은 은하계에서 최고로 썰렁한 춤판, 북극보다 더 냉랭한 벌판으로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엊그제까지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대던 양편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서로를 부둥켜안고 춤을 출 수 있겠는가? 설령 그 황당한 춤이 실현되더라도, 그것은 겉치레에 불과할 것이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듯이, 대결은 대결로 푸는 것이 순리다.
 

▲ 탁구는 엄연히 대결이다. 하지만 이만큼 ‘정치적으로’어울리는 종목이 있을까. 2017년 세계선수권대회 때의 이상수.

  탁구는 엄연히 대결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티모 볼에게 아깝게 진 이상수가 서브 리시브를 앞두고 정신을 집중할 때의 눈빛을 보라. 그것은 상대의 팔을 꺾어버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유도선수의 눈빛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탁구는 작고 가벼워서 맞아도 전혀 안 아픈 공을 주고받을 뿐, 상대의 활동 영역을 결코 침범하지 않는다. 요컨대 탁구는 분명 대결이지만 스포츠 종목들 가운데 눈에 띄게 정치적인 대결이요 외교적인 대결이다.
  1971년에 중국인들과 미국인들이, 그리고 지금 2018년에 우리 남북 동포가 화해의 첫걸음으로 탁구대회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는 로잔의 남북중일 친선 탁구대회가 끝난 뒤겠지만, 그 행사는 겉치레에 불과하지 않다. 맞선 양편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기에 탁구대회만큼 어울리는 행사는 없다. 삭막한 대결을 즐거운 대결로 뒤바꿔 화해의 물꼬를 트는 탁구의 마술에 경의를 표한다. (월간탁구 2018년 7월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글_전대호(시인, 번역가, 철학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더 핑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