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뜻밖의 결정타

노태우 제2정무장관의 특별배려로 마지막에 유치대표단에 낀 박종규 전 KOC 위원장은 지원단 일원으로 백의종군한 처지여서 유치대표단 공식 대표로 유치활동 전면에 나설 처지는 못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랜 친구사이인 바스케스 라냐(멕시코) ANOC 회장의 도움을 받아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국제 스포츠계 막후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던 서독 아디다스사의 다슬러 회장을 포섭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아프리카와 남미지역 IOC 위원들을 서울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다슬러 회장은 1980년 모스크바 IOC 총회 때 사마란치가 새 IOC 위원장에 피선되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 이후 그는 사마란치 위원장의 공공연한 후견인으로 행세하면서 특히 아프리카와 남미지역 출신 IOC 위원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었다. 이러한 그가 서울지지파로 돌자 나고야 개최를 고집하던 IOC 수뇌진도 서울 쪽으로 기울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등 제3세계 위원들의 표심에도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같은 점을 감안하면 박종규 씨야 말로 뜻밖의 결정타를 날린 주역이었다.

 

절찬 받은 제안연설

투표일을 하루 앞둔 1981년 9월 29일 IOC 총회에서 있은 올림픽 유치도시 설명회는 그때까지 중립적 입장이었던 IOC 위원들의 표 향방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대한 행사였다. 그런데 이 설명회를 맞는 서울과 나고야 유치단의 자세는 극히 대조적이었다. 자신들의 승리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승전무드에 젖어있던 나고야 대표단이 설명회에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은 반면, 서울대표단은 최후의 심판을 받겠다는 각오로 설명회를 준비했던 것이다.

서울 유치대표단은 특히 제안연설이 끝난 뒤 있을 IOC 위원들과 옵저버들의 질문에 완벽하게 답변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기했다. 김예식 KOC 전문위원이 서울에서부터 준비해간 150여개의 예상 질문 및 답변 문안을 놓고 여러 차례 토론을 벌였는가 하면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까지 점검하는 완벽을 기했다.
 

▲ 제24회 올림픽대회 서울유치가 결정되자 환호하는 한국대표단.

오전에 나고야 유치단의 설명회가 끝나고 오후 2시부터 서울 유치단의 설명회가 시작되었다. 박영수 서울시장이 유치선정 도시의 시장으로서 인사말을 한데 이어 조상호 KOC 위원장이 제24회 올림픽 서울 개최의 타당성을 역설하는 제안연설을 했다. 이어서 한국의 발전상과 현대 도시 서울의 올림픽 준비상황을 필름으로 담은 미니영화 〔 제24회 올림픽이 벌어질 한국의 수도 서울 〕이 16분간 상영되었다.

이어 약 30분간 13명의 IOC 위원 및 국제경기연맹 회장단의 질문이 있었다. 설명회가 끝나자 서울유치단에 호의적이었던 20여명의 IOC 위원들이 다가와 “아주 훌륭한 설명회였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서울 개최의 결정

1981년 9월 30일 오후 2시, 80명의 IOC 위원들은 제24회 올림픽의 유치신청을 한 서울과 나고야 중 한쪽을 택하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외부와의 출입이 통제된 쿠르하우스 회의실에 모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 40분 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위원들의 투표결과 집계표를 들고 발표장에 나타났다.

“서울 52표, 나고야 27표!”

예상하지 못한 서울의 압승이었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역사적인 선언에 현지의 대표들은 물론 서울의 상황실에서 발표장면을 텔레비전 실황중계를 통해 지켜보던 유치실무 대책반도 이 엄청난 차이의 승리를 실감할 수가 없었다. 바덴바덴 현지의 기자회견장은 만세와 환호성으로 뒤범벅이 되었고 태극기가 물결쳤다. 바덴바덴의 감격과 열광은 전파를 타고 한반도까지 출렁이게 했고 그로부터 8년 동안 한국 국민들은 민족적 긍지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IOC 결정의 의의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제24회 올림픽의 개최지 결정투표가 끝난 뒤 기자회견을 갖고 “IOC가 제24회 올림픽 대회의 개최지로 한국의 수도 서울을 택한 것은 올림픽 정신의 승리”라고 선언했다. 그만큼 제24회 올림픽의 서울개최가 지니는 의미는 자못 큰 것이었다.

사실 IOC가 개발도상국인 한국에 올림픽 개최권을 주기까지에는 대단한 용단이 필요했다. 특히 한국이 분단국으로서 국제 정치적 문제점이 많은 곳이라는 견해가 확산되어 더욱 그러했다. 즉 한국은 소련과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및 많은 비동맹국들과 국교관계가 없어서 이들 국가들의 대회 참가가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전쟁의 위험이 상존한 곳이라는 불안이 서울 쪽에 한 표를 던지는데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럼에도 많은 IOC 위원들은 오직 올림픽 운동을 정치오염으로부터 지키겠다는 숭고한 정신으로 서울올림픽을 지지했던 것이다.
 

▲ 52대 27의 막판뒤집기로 나고야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우리 유치단원의 조상호 KOC 위원장이 서울시의 올림픽유치 확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결정을 내리기까지 IOC 위원들은 여러 분야에 걸쳐 검토와 분석을 거듭한 것이 사실이었다. 국제 종합스포츠대회를 개최해본 경험이 없는 한국 체육계가 과연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는 대회운영 능력을 갖고 있겠는가, 또한 한국이 막대한 재정 부담이 뒤따르는 올림픽을 뒤따르는 올림픽을 준비할만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으며, 한국 국민의 절대 다수가 올림픽 대회의 개최를 열망하고 있는가 등에 대해 다각적인 분석을 계속했던 것이다.

현지의 언론이 서울 승리를 예상 밖으로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 많은 IOC 위원들이 즉흥적인 판단으로 서울 쪽에 한 표를 던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한국 정부 당국과 재계, 국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올림픽 유치를 열망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나서 “올림픽으로 분쟁지역 한반도에 평화를 심자”는 서울유치 대표단의 호소에 동조했다.

필자 역시 독일 바덴바덴에서 있었던 88년 올림픽 개최지 발표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하고 있다. “서울! 코리아!!” TV를 통해 들려오던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의 다소 흥분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만세 소리와 환호성이 뒤범벅이 되고 태극기가 물결치던 그날은 한국인아라면 참으로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간직할 일이다.

 

제10회 아시아 경기대회의 유치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의 한국 유치계획은 여러 면에서 매우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우선 국력이 그만큼 신장된 데다 제24회 올림픽의 서울 개최를 동시에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올림픽위원회(KOC)가 이 대회를 유치하는데 있어 주안점을 둔 것은 우리 한국이 아시아경기연맹(AGF) 창설회원국의 하나라는 점과 1970년도의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 개최권을 반납한 불명예를 씻고, 나아가 동남아시아와 아랍, 중국 등과의 국제친선을 도모하려는데 있었다.

또한 88년 올림픽의 서울 개최가 확정될 경우 올림픽을 위한 시설과 조직업무를 다소 앞당겨 활용함으로써 큰 부담 없이 치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AGF 회원국 선수와 임원들에게 미리 제24회 올림픽 현장을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고, 주최국으로서도 올림픽에 대비한 보완점 등을 사전 점검할 수 있다는 데서 더욱 적극적인 유치 활동을 벌였다.

KOC는 1979년 10월 8일에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서울유치계획을 공식 발표했고, 이듬해인 1980년 4월 24일에는 AGF 헌장 제26조 신청 절차규정에 따라 AGF 사무국에 개최신청서를 접수시켰다. AGF 규정에 의하면 개최신청서는 AGF 총회가 개최되기 90일 전까지 제출하게 되어있어 1980년 7월 24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AGF 총회의 시한으로 볼 때 규정기간 안에 접수시킨 나라는 한국뿐이었다.
 

▲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의 서울유치를 확정한 82년 뉴델리 AGF 총회를 마친 회의대표들의 모습.

그러나 AGF 총회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해 12월 4일부터 이틀 동안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렇게 총회가 연기됨으로 말미암아 제10회 대회 개최에 관한 혼선이 빚어졌다. 1980년 9월 8일자로 이라크가 유치를 신청한데 이어, 11월 15일에는 북한까지 유치신청을 해왔던 것이다.

12월 4일에 열린 AGF 총회는 ‘개최신청 3개국의 유치연설을 듣고 3개 후보지에 조사단을 보내 순방, 시찰하게 한 뒤 그 결과보고를 참고로 다음 AGF 총회에서 개최지를 결정하자’는 AGF 집행위 제안을 상정, 비밀투표에 부친 결과 ‘先시찰 後결정’이 채택되었다. 이에 딸 5명으로 된 조사단이 구성되었다.

AGF 조사단이 평양을 거쳐 서울에 도착한 것은 10월 19일이었다. 조사단 5명 중 말레이시아의 ‘함자’, 인도의 ‘메타’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오지 못했다. 3명의 조사단은 잠실지구의 체육시설과 태릉사격장을 살펴보고, 제10회 대회의 일정 종목 시설 교통 방향 등에 관한 27개 질문사항의 답변서를 요구, 이를 접수한 뒤 예정을 당겨 21일에 서울을 떠났다.

이에 앞서 KOC는 여러모로 유치활동을 벌여오고 있었다. 1981년 8월 6일부터 9일까지는 IOC 위원이며 AGF 회장인 인도의 발렌드라 싱이 KOC 초청으로 내한, 한국의 개최능력을 직접 살펴보기도 했다. KOC는 대회의 유치를 위해 모든 국제스포츠 회의에도 적극 참석하는 등 활발히 움직였다.

바로 이 무렵이던 1981년 9월 30일, 독일 연방공화국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 총회에서 서울이 일본 나고야를 52대 27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올림픽 개최권을 따냈다.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유치교섭을 벌여온 KOC의 입장이 급속도로 유리하게 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러한 유리한 여건 속에 제10회 대회의 개최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뉴델리 AGF총회가 1981년 11월 24일부터 27일까지 열리게 되었다. KOC는 AGF 총회에 조상호 위원장을 수석대표로 하는 공식대표 3명과 교섭반 5명, 실무반 6명을 파견했다. 정부 관계 인사와 현지 공관인들은 지원반으로 활동했다.

총회에 대비하여 KOC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조상호 위원장과 최말립 명예총무는 11월 8일 쿠웨이트의 파하드 AGF 부회장 겸 조사단장을 예방했고, 별도의 교섭반 5명은 태국 미얀마 방글라데시 일본 스리랑카 필리핀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레바논 인도를 각각 방문, 사전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11월 24일의 AGF 규정위원회에 이어 25일 열린 AGF 집행위원회에서 메타 사무총장은 이라크 NOC(국가올림픽위원회)로부터 ‘운영상의 애로로 인해 바그다드에서 제10회 대회를 개최할 수 없다’는 전문통보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이어 메타 총장은 싱 AGF 회장과 자신 앞으로 보내온 1981년 11월 9일자 북한 NOC 위원장 김유순의 ‘개최신청 철회 공한’을 낭독 보고했다. 북한 NOC의 공한내용에 관한 질의가 있을 후 메타 총장은 북한 NOC의 개최신청 철회가 조건 없는 완전한 철회임을 공표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NOC 대표단장이며 AGF 집행위원인 오트만 알사드는 “제10회 대회 개최권에 관해서는 한국만이 유일한 후보가 되었으므로 집행위가 지체 없이 한국의 개최신청을 수락하고 총회에서 한국 개최를 권고자”고 동의를 구했다. 이 동의는 파키스탄, 쿠웨이트 대표들의 재청으로 성립되고 집행위원들의 이의가 없어 그대로 의결되었다.

AGF 총회는 11월 26일 오전 9시 30분 뉴델리 아쇼카 호텔에서 26개국 대표 68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제10회 대회 개최권은 제2의제로 상정되어 오후 1시 10분에 속개된 회의에서 심의되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싱 AGF 회장은 AGF 집행위가 의결한 내용을 보고하고 이라크, 북한이 신청을 철회했으므로 한국만이 오직 개최 신청국 임을 선언했다. 싱 회장의 선언이 있자 북한 NOC 대표를 제외한 모든 대표들이 박수로 이를 통과시킴으로써 표결을 거치지 않고 만장일치로 제10회 대회 개최지를 한국 서울로 확정했다.

제10회 대회 서울유치는 여러모로 큰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6회 대회 반납에 따라 국제스포츠계에서 크게 실추됐던 한국의 공신력을 일소했다는 것이다. 정부와 체육계의 시각차에서 빚은 6회 대회 반납으로 한국은 ‘아시아 스포츠계의 위약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낙인을 감수해야 했을 뿐더러 25만 달러의 적자 보상금까지 무는 고역까지 치러야 했다.

둘째로 국민에게 자신감과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준 일이라 할 수 있다. 60년대 70년대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한국은 세계경제의 중요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개발도상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심정이 국민 마음 속 저변에 깔려 있었다.

바로 그러한 시점에서 이루어진 아시아경기대회의 유치는 한국이 아시아권에서의 경제 선두주자임을 인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더구나 올림픽 유치까지 확정되면서 선진대열에 성큼 뛰어 오르는 조국을 느끼면서 민족적 자긍심과 자심감이 치솟게 된 것은, 스포츠가 경제 발전에 매진해온 국민에게 전한 크나큰 선물이었다.(대한체육회 70년사 참조>

 

탁구,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제24회 올림픽 대회가 서울로 유치된 경사와 더불어 탁구인들은 또 하나의 큰 선물을 받았다. 이튿날인 1981년 10월 1일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88 올림픽부터 탁구와 테니스를 경기종목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이로써 올림픽 정식종목은 모두 23개 종목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 같은 결정은 당연히 전 세계 탁구인들에게 큰 경사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집안에서 감격스러운 탁구 올림픽 원년을 맞게 된 한국탁구계의 흥분은 어느 때 보다도 절정에 달해 있었다.

로이 에반스 국제탁구연맹(ITTF) 회장 또한 “어느 종목에 못지않은 탁구가 올림픽 종목에 포함된 것에 대해 커다란 기쁨을 금치 못하겠다.”면서 “탁구를 통해 IOC 규정을 충실히 지키며 올림픽 정신을 발휘하겠다.”고 통신을 통해 소감을 발표했다. 올림픽 탁구의 경기방식을 당시 구체적으로 결정되지 않았으나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남녀 개인전만 시행하는 것으로 발표했다.

한편 대한탁구협회는 올림픽 대회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됨에 따라 긴급 이사회를 소집, 올림픽 및 아시안게임에 대비한 장기 훈련계획을 수립했다. 우선 초등학교 5,6학년 미 중학교 1,2학년생을 대상으로 소질 있는 선수를 조기발굴하고 전형별로 대회를 열어 1차 후보 선수를 선발하기로 했다. 선발된 선수들은 장기 합숙훈련을 시키는 한편 여름과 겨울방학을 이용한 해외 원정 등으로 기본기 및 국제적응도를 높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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