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헤로도토스의 역사 VS 사마천의 사기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은 자신이 겪거나 터득한 일들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왔다. 특히 종이와 문자가 발명된 이후에는 ‘기록’을 통해 보다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역사’라는 분야는 특별하다. 역사가 고리타분한 과거의 기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람들은 현재의 눈과 문제에 비추어 역사를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역사가의 말처럼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며 살아있는 기록이다.

▲ 헤로도토스(좌)와 사마천(우).


세계를 여행하며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다, 헤로도토스

그리스인 헤로도토스(B.C.484년경~425년경)는 ‘역사’라는 최초의 역사서를 쓴 사람이다. 이에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 저술가인 키케로(B.C.106~43)로부터 ‘역사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히스토리(history)라는 단어에 역사라는 의미가 더해진 것이 이 책에서 시작되었으니 키케로는 헤로도토스에 대해 매우 적절한 평가를 한 셈이다. 그러나 정작 헤로도토스라는 인물의 개인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저 자신의 저술을 통해 신상에 관한 몇 가지를 설명해 놓았을 뿐이다. 먼저 그는 소아시아의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이며 집안이 정치 분쟁에 휩싸이면서 고향을 떠나 사모스섬으로 망명했다고 전한다. 또, 한 때 아테네에서 살면서 페리클레스나 소포클레스와 같은 유력가들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건은 B.C.454년경부터 경험한 약 10년간의 여행이었다. 헤로도토스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던 페르시아 전쟁을 주제로 책을 쓰고자 했고 전쟁과 관련된 지역들을 직접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려 했다. 따라서 그는 이집트, 바빌론, 리비아, 흑해 연안을 포함해 당시 그리스인에게 있어서는 전 세계나 다름이 없었던 수많은 곳들을 여행하게 된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그저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만 기록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여행한 지역의 문화, 정치, 지리, 풍습 등을 수집해서 기록했고 직접 본 것이 아니거나,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하다고 전해진다’는 설명과 함께 그 진위는 알 수 없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런 점 때문에 헤로도토스는 사실만 기술한 것이 아니라 과장을 섞어 지어낸 이야기들로 책을 썼다고 오랫동안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수많은 탐험가의 조사와 역사가들의 연구에 의해 2,500년간 허무맹랑하다고 평가절하 받아온 헤로도토스의 서술들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예를 들어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나일강이 눈이 녹아 생긴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 자신도 무더운 이집트에 눈이 쌓인다니 믿을 수가 없다고 기록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실제로 나일강의 수원이 빙하와 만년설이 덮여있는 루웬조리 산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고대의 역사이기에 그동안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었던 메소포타미아 왕들에 대한 기록들도 현대에 발굴된 점토판을 통해 그 정확성이 확인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점토판 훼손으로 누락된 기록을 헤로도토스의 서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이에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현대에 와서 오히려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의 가치는 그저 고대 역사서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 천 년 전의 생활상과 문화, 자연 과학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버지의 유언이 자신의 염원이 되다, 사마천

‘사마’가문은 원래 역사가 집안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사마천(B.C.145년~B.C86?)의 부친 사마담 또한 가업을 이어받아 천문이나 달력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태사령이란 관직을 맡아 일해 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태사령이 점술사와 비슷하게 인식되면서 일반 대중의 평가는 낮았기 때문에 이를 이어받아야 했던 사마천도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사마천은 20세가 되자 더 큰 세상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2년 동안 옛 왕들이나 위인들의 무덤과 유적지 등을 직접 둘러보고 돌아왔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마천은 가업을 이어나가기보다 직접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관직에서 일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지만 부친 사마담의 유언이 발목을 잡았다.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의 커다란 국가 제례 행사였던 봉선 의식에 참석을 허락받지 못한 사마담이 화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아들에게 자신이 집필하던 역사서를 완성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결국 사마천은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 직을 수행하게 된 것은 물론 역사서의 완성이란 짐까지 짊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마천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 사건은 흉노족에게 패해 항복한 이릉 장군을 홀로 변호하면서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된 일이었다. 평소 깊은 친분도 없던 이릉 장군이었지만 그가 승전보를 전할 때마다 환호하던 사람들이 단 한 번의 패전에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고 이릉을 변호하는 발언을 했다가 황제에게 도전한다는 죄명을 받게 된 것이었다. 결국 어마어마한 별금을 내든가, 죽든가, 그도 아니면 거세형을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었는데 살아서 부친의 유언을 받들고자 했던 사마천은 거세형을 선택했고 그로 인해 남은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이후 사마천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하루에도 장이 아홉 번 뒤틀리고 죽고만 싶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글을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B.C.90년경에 ‘태사공서’를 완성하게 되었다. ‘태사공서’는 후한 말기부터 ‘태사공기’로 불리기 시작했다가 이후에 약칭인 ‘사기’가 정식 명칭이 되었다. 사기는 B.C.22세기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B.C.2세기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왕들의 연대기로 구성된 ‘본기’, 연표로 구성된 ‘표’, 법과 제도 등을 다룬 ‘서’, 제후들의 이야기인 ‘세가’, 끝으로 왕과 제후를 제외한 중요 인물들을 다룬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을 기전체라고 부르는데 19세기 말까지 중국 역사 서술의 주된 방식이 된다. 


히스토리(history)와 역사(歷史)

서양 역사 서술의 시조가 헤로도토스라면 동양 역사 서술의 시조는 사마천이다. 물론 이들 전에도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역사서가 아닌 개인 저작으로서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사마천의 사기는 동서양을 대표하는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받는다. 또한 이들은 ‘역사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커다란 전환점을 제시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헤로도토스와 사마천 이전의 역사는 단순하게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후의 역사는 과거의 일을 조사하고, 연구한 내용이라는 의미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사건을 기록하기 위해 10년이란 시간을 여행하며 직접 취재하고 자료를 수집했고, 사마천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태사령이란 공직자로서 접할 수 있는 모든 공식 자료들에 접근해서 분석하고 연구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문화, 사건, 인간, 제도 등 보다 광범위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헤로도토스와 사마천이 기록한 역사가 수 천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읽히고 연구되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월간탁구 2019년 7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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