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항우 VS 유방

두 사람이 각각 16개의 패를 번갈아 놓으며 상대방의 패를 빼앗는 놀이가 장기다. 이때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왕에 해당하는 패에는 항우를 상징하는 초(楚), 유방을 상징하는 한(漢)이 적혀있다. 항우와 유방이 전쟁을 벌인 기간은 불과 5년에 불과했지만 2천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장기판 위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는 그 당시에도, 그리고 현재까지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진나라의 멸망이 부른 혼란의 시대

중국 역사상 가장 긴 분열의 시대였던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秦)나라(B.C. 221∼B.C. 206)를 세운 사람은 그 유명한 시황제다. 그는 아방궁을 지었고, 만리장성을 쌓았고, 영생을 꿈꿨지만, 결국 죽음을 맞으며 호화로운 진시황릉 속에 잠들었다. 이렇듯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백성들을 동원해 끊임없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왔던 시황제가 죽자 그동안 억압받아온 이들이 전국 각처에서 봉기를 시작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통일 제국 진나라는 시황제의 죽음과 함께 허무하게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로 과거의 제후 세력들을 중심으로 봉기한 수많은 반란군 무리 중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진나라에 의해 망한 초나라 명장이었던 항연의 후손 항량과 그의 조카인 항우의 무리였다. 어릴 때 부모를 잃은 항우는 숙부 항량의 손에 키워졌는데 일찍부터 뛰어난 무예의 소질을 보였다. 특히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전해지는데 스스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힘이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는다)라고 칭할 정도였다. 이들은 초나라 마지막 왕의 후손을 찾아내 초회왕으로 옹립한 후 초나라의 재건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초나라의 이름으로 진나라를 타도하겠다는 항량과 항우의 세력에 가담한 일행 중에는 유방의 무리도 있었다. 유방 역시 초나라 사람이었지만 항우와는 달리 평범한 농민 출신이었다. 진나라의 말단 관직에 있었던 유방은 토목 공사에 동원할 사람들을 데리고 여산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감당하기 힘들었던 노동 강도와 형벌에 지레 겁을 먹은 사람들이 매일 도망을 쳤다. 이에 유방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여산에 가면 일에 지쳐 죽거나 매를 맞아 죽을 것’이라며 ‘각자 풀어줄 테니 살길을 찾아가라’고 했다. 그리고 유방 자신도 갈 곳 없는 일부 사람들과 함께 망탕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유방은 후에 이들을 이끌고 항량과 항우의 무리에 가담했던 것이다. 
 

▲ 항우(좌)와 유방(우)


함양을 차지하는 자가 왕이 된다

항량이 죽고 봉기군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 항우의 무리에게 진나라 수도인 함양을 공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에 초회왕은 출정을 앞둔 장수들을 독려하기 위해 ‘함양을 평정하는 자를 그곳의 왕으로 봉하리라’고 선언했다. 항우는 북로, 유방은 남로를 택해 함양을 향해 진군하였는데 특히 항우는 함양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20만 명의 진나라 주력군을 격파하며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된다. 하지만 그 틈에 함양에 먼저 입성해 진나라의 마지막 왕인 자영에게 항복을 받아낸 사람은 유방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항우는 대노하며 뒤늦게 함양으로 달려왔고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유방을 위협했다. 막강한 군사력의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유방은 굴욕을 무릅쓰고 약 백여 명의 군사만을 대동해 항우를 찾아가 자신을 신하라고 낮춰 부르며 항우에게 사죄하게 된다. 마음이 누그러진 항우는 잔치를 벌였지만, 그의 책사였던 범증은 장차 유방이 항우에게 위협이 될 것을 염려해 그를 그 자리에서 제거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항우가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는 사이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유방은 자신의 군영으로 도망가 목숨을 건지게 된다. 

함양을 완전히 차지한 항우는 무자비한 약탈을 시작했다. 자신에 앞서 함양에 입성했던 유방이 모든 재물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군사들 역시 민간에 피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엄격한 관리를 한 것과는 상반되는 행위였다. 항우는 이미 항복한 진나라의 마지막 왕과 왕족은 물론 관리 4천명을 몰살시켰고, 궁을 불사르고, 시황제의 왕릉을 파헤치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수많은 보물을 가지고 고향인 팽성으로 가서 그곳을 수도로 정한 후에 자신을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했다. 이제 항우에게 대적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회왕마저 ‘의제’라는 이름으로 치켜세우는 듯하다가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패왕이 된 항우는 자신들을 따랐던 장수들의 공로를 치하하며 18명의 제후를 임명했다. 그러나 공적이 아닌 항우와의 친분 관계가 기준이 되면서 불만을 품게 된 장수들에게 원성을 사게 되었고 반란 또한 끊이지 않게 되었다. 유방 역시 한왕이란 이름으로 제후로 봉해졌지만, 그에게 주어진 땅은 당시 유배지나 다름없었던 한중이었다.
 

▲ 패왕별희는 항우와 그의 애첩인 우희의 최후를 그린 중국의 경극이다. 사진은 영화 패왕별희의 한 장면.


자신만을 믿었던 항우와 참모들을 믿었던 유방 

한동안 유방은 한중에서 항우의 눈치를 살피며 지내야 했다. 그곳에서 유방의 참모였던 한신은 ‘항우의 처우에 불만 있는 장수들이 많으니 항우와 반대로 행동하면서 인심을 장악하라’고 조언했고 유방은 그에 따라 조금씩 주위 제후들을 설득하거나 항복시키면서 세를 키워나갔다. 그리고 과거 제나라 세력들이 항우에 반발하는 사이에 한중에서 나와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유방이 항우의 적수가 되기에는 군사력은 물론 기세 또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항우는 천성적으로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장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방은 항우와의 대결에서 번번이 패해 멀리 도망쳐야만 했다. 이 두 사람의 본격적인 대결은 앞서 언급한 장기는 물론 ‘초한지’라는 소설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항우는 ‘패왕별희’라는 중국의 경극과 동명의 영화를 통해서도 유명하다. 그만큼 항우라는 캐릭터는 너무나 매력적이고 인상적이지만 유방과의 대결에서는 끝내 승리하지 못했다. 

그토록 뛰어난 장수였던 항우가 평범해 보이는 유방에게 패배하고 말았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유방이 항우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특출난 장점을 하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믿을 줄 안다는 것이었다. 유방은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귀담아들을 줄 알았고, 또 사람들을 믿었기에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실제로 유방이 맞은 위기의 순간마다 그를 살렸던 것은 참모들의 지혜와 그들의 지혜를 따르기로 한 유방의 결정이었다. 

그에 비해 항우는 자기 자신 외에는 믿지 않았다. 따라서 항우는 범증이라는 뛰어난 책사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용하지 못했고 결국 그를 불신하여 내치기까지 했다. 또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였기에 독불장군 행세를 했고, 능력 있는 자들을 곁에 두지 못했다. 결국 항우는 유방과의 대결에서 항상 이겨왔지만 <해하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고 강남으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자는 부하들의 마지막 권유마저 거부하며 자결하는 바람에 그 전투는 항우에게 있어서 마지막 전투가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항우가 유방에게 배워야 했던 것은 타인을 신뢰하는 방법이 아니라 제대로 실패하는 방법, 그리고 그에 좌절하지 않고 재기하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단 한번의 패배로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항우였으니 말이다.  

<월간탁구 2019년 4월호 게재>

 

저작권자 © 더 핑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