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탁구공에 담아낸 ‘모두의 승리’

세계인들의 ‘화합’을 담는 공식 주제가

아프리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개최된 1939년 제13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유럽 외 지역에서 처음 열린 세계대회였다. 파루크(Faruk) 당시 이집트 국왕은 세계대회 개최를 기념한 일명 ‘이집트컵’을 국제탁구연맹(ITTF)에 기증했는데, 이 트로피는 세계선수권대회의 영광과 우정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현재까지도 개최국들이 돌아가면서 보관한다.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세계인들의 우정과 친선을 중요한 모토로 삼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어느덧 백 년 가까운 역사를 쌓아가고 있는 세계선수권대회는 대회마다 세계인들의 화합을 다짐하는 이벤트를 별도로 준비하곤 한다. 성적과 관계없이 페어플레이상을 따로 시상하고, 백발성성한 왕년의 영웅들이 나와 과거를 회상하는 랠리를 펼치기도 한다. 개최지 특성이 반영된 마스코트나 엠블럼 등도 모든 탁구인들의 시선이 모이는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보다 의미 있는 잔치로 이끌기 위한 장치다. 2.7g의 작고 가벼운 공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장관을 연출할 수 있는지를 극대화해 보여주는 현장이 바로 세계탁구선수권대회다.

개막식 연주 이후 다양한 상황에서 변주되는 대회 주제가 역시도 세계선수권대회의 주요한 상징이 된다. ITTF는 대회마다 주제가를 따로 만들어 개회식에서 소개하도록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세계대회 현장에 울려 퍼진 노래들도 벌써 수십 곡이 쌓인 셈이다. 주최국들은 자신들의 색깔 위에 세계인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정서를 담아 개성 있는 노래들을 발표해왔다. 주제가는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를 개최하는 한국탁구에도 주어진 과제였는데, 부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주제가 공식 녹음이 지난달 마무리됐다. 녹음 현장을 찾았다.
 

▲ 주제가 작업을 총괄한 바이올리니스트 노엘라 씨.

Flying through the sky above / spinning like a dancing star / go higher with your heart / be braver with your mind / 'cause we'll be standing right beside you.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요 / 춤추는 별처럼 회전해요 / 마음은 더 높이 / 생각은 더 담대하게 / 우리가 당신 곁에 있을 테니까요.

‘2.7grams of hope(2.7g의 희망)’이라는 제목이 붙은 부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주제가는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가로 유명한 노엘라 씨가 직접 작사를 맡았으며, 녹음 전 과정도 총괄 지휘했다. <광해, 왕이 된 남자>, <말아톤> 등 영화음악으로 4차례에 걸쳐 청룡상과 대종상 음악상을 수상한 바 있는 영화음악가 김준성 감독의 원곡에 편곡이 더해졌으며, 부드러운 허스키 음색과 가창력의 소유자로 최근 가요계에서 남다른 주목을 받는 가수 HYNN(박혜원)이 녹음에 참여했다.

그런데 바이올리니스트 노엘라 씨가 예정에 없던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주제가 작업을 총괄하게 된 과정이 흥미롭다. 2016년 리우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리듬체조 벨라루스 대표였던 멜라티나 스타니우타가 노엘라 씨의 연주곡인 ‘아뉴스데이’를 사용해 올림픽 후프 연기를 펼쳤다. 한국대표 손연재와 라이벌 관계였던 스타니우타가 한국 연주자의 곡을 선택했다는 사실 때문에 꽤 많은 화제를 모았었던 일이다.

‘아뉴스데이’는 노엘라 씨의 첫 번째 음반 <샤이닝 클라우드(Shinning Cloud)>의 마지막 수록곡으로 바이올린 테크닉을 극대화시킨 클라이맥스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스타니우타는 극적인 리듬 스텝을 선보이며 음악의 역동감과 어우러진 강렬한 엔딩으로 흡입력 있는 무대를 선보였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자신이 미처 몰랐던 선수가, 자신의 연주곡을 배경으로 연기를 펼치는 모습을 보면서 노엘라 씨가 받았을 감동이 어땠을지는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그 후 스타니우타와 SNS 등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은 노엘라 씨는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인연도 조금씩 키워갔다. 사실 그는 장르를 넘나드는 아티스트로 유명한 인물이다. 세계적인 명문음대 뉴잉글랜드 음악원(New England Conservatory)을 거쳐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 최초 뉴에이지 바이올린 음반으로 평가받는 <Shinning Cloud>와 <Beautiful Sorrow> 등 두 장의 앨범을 냈다. 그의 예술 에세이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Ⅰ·Ⅱ(나무수 刊)>는 예술 분야 베스트셀러이며, 그림과 음악의 하모니를 주제로 강연과 공연을 접목한 ‘렉처 콘서트(Lecture Concert)’도 그가 개척한 분야다. 또한 소설 <빨주노초파람보(가디언 刊)>를 내면서 영역을 무한정 확대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콜라보레이션 무대의 선두주자’라고도 불린다. 직접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영화에 들어맞는 음악과 명화를 공연무대에 접목시킨 신개념 콘서트 <마이 디너 위드 노엘라(My dinner with Noella)>는 공연마다 큰 주목을 받으며 전석 매진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이 특별한 예술가와 스포츠 계통의 인연은 또 하나의 특별한 콜라보레이션을 이뤄내는데, 바로 평창올림픽 성공기원 프로젝트로 진행했던 ‘원 빅토리(ONE VICTORY)’다.
 

▲ 음정과 멜로디, 발음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점검하는 노엘라 씨다.

Be the glowing light of dreams / let it grow to be the one / go higher with your heart / be braver with your mind / 'cause you are not alone we're with you.
찬란하게 빛나는 꿈들이 되어요 / 꿈들이 하나로 자랄 수 있게 해요 / 마음은 더 높이 / 생각은 더 담대하게 /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하니까요.

<ONE VICTORY>는 2018 평창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며 아티스트 3인이 발매한 음반이다. 크로스오버 테너 임철호가 노래하고, 김준성 음악감독이 작곡, 노엘라 씨가 작사와 바이올린 피쳐링, 총괄기획을 맡았다. 이 곡이 각별한 화제를 모은 것은 한국에서의 동계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캠페인송으로 활용한 때문이었는데, 발매와 동시에 SNS를 통해 전 곡이 공개됐다. 가사가 삽입된 뮤직비디오를 올리고 악보와 MR을 공유했다. 그리고 ‘원 빅토리’ 함께 부르기 캠페인 참가자들을 모았다. 각계각층 사람들에게 영상의 취지를 알리고 참여를 독려했다.

참여 열기는 생각보다 뜨거웠다. 리우올림픽을 통해 인연을 맺은 스타니우타는 음악에 맞춘 체조 연기를 영상에 담아 벨라루스로부터 보내왔고, 미국의 배우 겸 모델 크리스찬 벤슨이 할리우드에서 영상을 찍어 보냈다. 미얀마의 오디션 프로그램 <갤럭시 스타 2017>의 참가자들이 자국 국기를 들고 노래하는 모습도 보내왔다. 국내에서도 활발한 동참이 이어졌는데, ‘아프니까 청춘이다’ 김난도 교수, ‘그댄 행복에 살 텐데’ 가수 리즈, 휠체어육상 패럴림픽 금메달리스트 홍석만 IPC 선수위원 등이 노래를 함께 불렀다. ‘스마일 화가’ 이목을은 스튜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올 동안 미술 작품을 그려내고 작품명을 <평창의 스마일>이라 붙였다.

해금연주자 이유라, 배우 최규진, 2011 미스코리아 출신 DJ 김혜선, 2006 미스코리아 출신 작가 김수현 등도 다양한 모습으로 캠페인을 함께 했다. 뉴욕 타임스퀘어 앞에서, 자신의 방안에서, 어느 유치원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세계의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보내진 영상과 자료를 편집하고 다듬는 작업 역시 이윤철 영상감독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졌다(이윤철 감독은 탁구 주제가 뮤직비디오 작업에도 동참한다). 그렇게 완성된 영상은 참여한 원 빅토리 멤버들의 SNS 계정을 통해 평창올림픽 개막 하루 전 동시 공개되면서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원대로 평창올림픽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탁구인들도 원 빅토리 캠페인 영상이 공개되자 누구보다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바로 아테네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유승민 IOC 선수위원(현 대한탁구협회장)이 등장해 씩씩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승민 회장이 IOC 위원에 당선된 올림픽이 바로 노엘라 씨와 스타니우타의 인연이 시작된 리우올림픽이다. 유승민 위원은 평창에서는 선수촌장을 맡아 성공 개최에 기여했다. 유승민 위원과 원 빅토리 프로젝트 기획자 노엘라 씨와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의 ‘원 빅토리’를 노엘라 씨는 “여러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진행해봤지만 가장 의미 있었던 작업이다. 음악을 통해 세계가 하나 되는 꿈이 현실로 이뤄진 일이었다”고 돌아봤다. 유승민 회장 또한 “자발적 캠페인이 고마워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고 말했다.
 

▲ 노엘라 씨는 모든 탁구인들이 ‘2.7grams of hope’와 함께 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작사와 바이올린 피처링도 맡았다.

Flying through the sky above / spinning like a dancing star / above the wall of net / go spread your wing and fly / 'cause we'll be standing right behind you.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요 / 춤추는 별처럼 회전해요 / 장벽 같은 ‘네트’ 위로 / 날개를 펴고 날아 봐요 / 우리가 당신을 받쳐줄 테니까요.

2020 부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공식 주제가 ‘2.7grams of hope’는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캠페인으로 진행됐던 ‘원 빅토리’를 탁구에 맞게 옮겨놓은 곡이다. 완전히 새로 만드는 수고 대신 여전히 유효한 캠페인 당시 취지를 되살리자는데 유승민 회장과 노엘라 씨의 공감대가 형성됐다. 올림픽 공식 콘텐츠가 아니었고, 작업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그대로 다시 뭉쳤으므로 저작권이나 어떤 법적 문제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사용에 제한도 없다. 평창올림픽이 그랬던 것처럼 세계탁구선수권대회도 한국에서는 처음 열리는 대회다.

노엘라 씨는 “테너가 불렀던 클래식 곡을 가요 형식으로 바꿔 보다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편곡했다. 가사도 탁구에 맞게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2.7grams of hope’는 남을 누르고 내가 이기는 것보다 모두가 승리하는 ‘화합’을 담은 곡이다. 테이블을 가로지른 ‘장벽(네트)’을 넘나드는 탁구공의 상징성과도 닮아있다. 부산에서는 남북단일팀 코리아가 출전할 수도 있지 않나. 탁구공을 메타포 삼아, ‘원 빅토리’로 연결되는 매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고 곡의 취지를 설명했다. “2.7g의 작은 공 하나로 세계가 하나 되는 풍경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포츠 중에 탁구를 제일 좋아한다”는 뜻밖의 고백(?)도 했다. “부모님이 워낙 탁구를 좋아하셨다. 집에 탁구대가 있었을 정도다. 자연스럽게 나도 많이 치고 놀았다. 또 언니가 안재형(전 국가대표 감독) 씨의 열렬한 팬이었다. 자오즈민과 결혼하던 때도 생각난다”면서 웃었다. “유승민 회장의 제안이 있기도 했지만 ‘탁구’라서 더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다”고 속내를 전했다. “여러 운동 종목이 있지만 하나만 해야 한다면 탁구를 할 거다.”

내년 3월 22일부터 29일까지 부산 벡스코, 한국에서는 처음인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린다. 개회식 때 울려 퍼질 ‘2.7grams of hope’는 ‘모두의 승리, 하나 되는 세계’를 노래할 것이다. 그대로 세계선수권대회의 취지다. 현장을 찾을 탁구팬들은 라이브 연주로 참여할 바이올리니스트 노엘라 씨의 감동적인 선율도 만나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진행 상황에 따라 주제가는 한국의 팬들에게 먼저 공개될 수도 있지 않을까. 노엘라 씨는 “가요처럼 편곡한 만큼 많은 분들이 듣고 따라 불렀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했다.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 공식 주제가 ‘2.7grams of hope’는 대회 공식 홈페이지(https://www.wttc2020busan.com/ko/pc/symbols)에서 들을 수 있다. (월간탁구 2019년 12월호 / 글_한인수 | 사진_안성호)
 

▲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주제가 녹음이 있던 날, 밝은 분위기의 녹음실이다.

 
▲ 노래는 주목받는 신인가수 HYNN(박혜원)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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