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페라리 VS 람보르기니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자동차 브랜드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서로를 의식하고 견제하며 성장해왔다. 무엇보다 창업주인 엔초 페라리와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인 특유의 다혈질 성향은 회사가 만들어지고 성장해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스피드에 열광한 엔초 페라리

▲ 레이서 출신의 엔초 페라리.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에서 태어난 엔초 페라리(1898~1988)는 10살 때 볼로냐에서 난생처음 자동차 경주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때부터 자동차에 푹 빠진 페라리는 13살이 되던 해부터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자동차 정비소를 차리면서부터는 자동차와 더욱 가깝게 지내게 된다. 그는 20살 무렵부터 전문 레이서가 되겠다고 결심했지만 꿈을 이루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한동안 트럭 회사에서 운전대를 잡아야 했고, 운 좋게 입사한 스포츠카 회사 CMN는 1년 만에 파산하고 말았다. 하지만 실력을 인정받은 덕분에 이탈리아 최고의 레이싱팀인 ‘알파 로메오’에 입단해 운전석에 앉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는 알파 로메오에 소속된 동안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1929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레이싱팀이자 페라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스쿠데리아 페라리’까지 설립한다. 페라리는 이 팀에서도 여전히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지만 1932년에 아들이 태어나자 현역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팀 관리와 경주용 자동차 제작에만 몰두했다. 

사실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아마추어 레이서들에게 알파 로메오의 차량을 지원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팀이었다. 따라서 알파 로메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939년에 알파 로메오가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흡수하고 페라리를 내쫓으려 하자 페라리는 알파 로메오와는 완전히 결별하고 만다. 그렇게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지킬 수는 있었지만, 알파 로메오 측은 ‘향후 4년 동안 페라리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자동차를 생산하지 말라’는 조건을 내밀었다. 페라리로서는 자신이 몸담았던 알파 로메오에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덕분에 페라리는 이를 악물고 알파 로메오를 뛰어넘는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페라리가 처음으로 제작한 모델인 ‘티포 815’가 레이싱 도중 엔진 결함으로 완주를 포기하는 일이 발생했음에도 페라리 이름을 붙이지 않은 덕분에 큰 데미지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진정한 페라리 자동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모델은 1947년에 만들어진 ‘페라리 125 스포츠’다. 12기통 엔진을 사용한 이 자동차는 발표된 지 2주 만에 ‘피아첸차 서킷’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스포츠카 ‘페라리 166S’를 필두로 경주용이 아닌 도로용 자동차도 선보이게 된다. 스폰서에게 의존도가 높은 경주용 자동차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회사를 경영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페라리가 일반 대중들도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엔진에 미친 페루치오 람보르기니

페루치오 람보르기니(1916~1993)는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 레나초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자동차를 좋아했던 람보르기니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고 그 전공을 살려 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군에서 군용차량 정비 일을 했다. 그런 그의 눈에 전쟁터에서 쓰인 후 버려진 군용차들이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람보르기니는 제대를 하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 트랙토리체’라는 회사를 세우고 그런 군용차를 트랙터로 개조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람보르기니의 트랙터는 절대 고장이 나지 않는 제품으로 명성을 얻으며 이탈리아 전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원래 트랙터 사업을 했었다.


트랙터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람보르기니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세계의 명차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페라리가 만든 250GT도 있었는데 당시 페라리는 전 차종에서 클러치 결함이 잦은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에 람보르기니는 직접 250GT를 분해해보고 원인을 찾아낸 후 직접 엔초 페라리를 만나 자신이 찾아낸 결함을 이야기해 주려 했다. 순수하게 같은 엔지니어로서 페라리와 자동차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해보고 싶어 했던 람보르기니였지만 당시 연이어 F1의 우승을 차지하며 승승장구를 달리고 있던 페라리의 귀에 그의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호의를 가지고 찾아온 람보르기니에게 페라리가 한 말은 “자동차를 볼 줄 모르는 것 같은데 그냥 트랙터 운전이나 해라”였다. 


자신의 트랙터 회사와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페라리의 말에 큰 모욕감을 느꼈고 결국, 1963년에 자동차 엔지니어들과 디자이너들을 고용해 계획에도 없었던 자동차 회사 ‘람보르기니’를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회사의 제1 사칙은 바로 ‘무조건 페라리보다 빠른 자동차’였다. 


페라리 VS 람보르기니

페라리의 초기 목적은 레이싱 경주에서 우승할 만큼 빠른 자동차를 만드는 일이었다. 엔초 페라리가 레이서 출신인 이유도 있지만 알파 로메오와 결별 후에 겪게 된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대회의 우승 상금을 거머쥐어야 했기 때문이다. 페라리로서는 대회에서 우승 상금을 받는 일만이 다음 경기의 출전 준비 자금을 마련하는 길이었고 따라서 고성능, 초고속 자동차를 만드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페라리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동차를 만든 지 4년 만인 1951년에 영국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엔초 페라리는 대회의 우승 인터뷰에서 “어머니를 죽였다”는 말로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이 대회야말로 그를 최고의 레이서로 키워줬지만 동시에 매몰차게 내쫓으려 했던, 세계 챔피언 레이싱팀 알파 로메오를 꺾은 첫 대회였기 때문이다. 이후 페라리는 전 세계의 레이싱 대회에서 5,000회 이상 우승하며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자동차 회사로 성장해 나간다. 
 

▲ 페라리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페라리 125 스포츠’



재미있는 것은 알파 로메오로부터 받은 자극이 페라리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처럼 람보르기니가 트랙터 회사에서 자동차 회사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페라리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페라리보다 빠른 자동차를 지향했던 람보르기니는 1966년 제네바 모터쇼에 시속 295km의 속력을 낼 수 있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 속도의 스포츠카 미우라를 출품했다. 이 자동차는 성능과 디자인 모든 면에서 페라리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으며 세계 최초로 ‘슈퍼카’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무엇보다 미우라를 접한 엔초 페라리로부터 “미드십(엔진을 운전석 뒤쪽에 배치해 차량의 전후 밸런스를 맞춘 방식) 엔진 방식은 우수하다”라는 평을 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페라리를 포함한 타 브랜드의 자동차들도 미드십 방식을 따르게 된다. 이에 람보르기니는 “페라리가 우리를 흉내 낸다”는 말로 자신의 성과를 자축하기도 했다. 
 

▲ 역사상 최초의 슈퍼카인 ‘람보르기니 미우라’



엔초 페라리가 90세에 세상을 뜨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나는 91세까지 살아 그를 이기겠다’며 경쟁심을 불태웠다. 하지만 그는 결국 페라리가 죽은 지 5년 만에 7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자동차 사업에 손을 떼고 연로해진 후에도 이런 말을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니 사실 유치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은 상대에 대한 복수심이 이 두 사람에게만큼은 결국 긍정적인 에너지가 되었던 것 같다. 복수심이 낳은 결과물이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라니 멋지기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고 말이다.

<월간탁구 2017년 12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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