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지의 인물탐구> 아시아게임 국가대표, '마지막'이 아닌 '시작'을 꿈꾼다!

죽을 것처럼 간절하게. 행여 놓칠까 주먹을 꽉 움켜쥐면, 꿈은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갔다. 이제 그만 꿈을 놓아버리고 싶었을 때, 하늘에선 거짓말처럼 동앗줄이 내려왔다. 때로 운명은 잔혹하다. 파란불만 켜지던 길이 예고없이 가로막힌다. 그리고 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길은 시작된다. 인천에서 생애 세 번째 아시안게임에 도전하는, 서른 살 이정우의 ‘파란만장’ 탁구인생도 그랬다.
 

 

► ‘낀 세대’ 포기는 없다

인천아시안게임이 펼쳐지는 수원실내체육관에서 맹훈련중인 이정우를 만났다. “아시안게임에 나서게 될 줄 몰랐다”며 싱긋 웃었다. 도하아시안게임 단체전 은메달, 혼합복식 은메달, 광저우아시안게임 단체전 은메달의 주역이다. 인천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에서 ‘국내 랭킹 1위’ 정영식과 ‘닥공’ 이상수가 고배를 마셨다. 이변이었다. 이미 추천으로 발탁된 ‘깎신’ 주세혁에 이어 ‘신흥 에이스’ 김동현과 정상은이 선발됐다. 예기치 못한 이변 속에 경기력향상 위원회는 복식과 단체전에 능한 ‘멀티플레이어’ 왼손의 이정우를 떠올렸다. 경험치를 높이 샀다. 지난 3월 소속팀 농심이 해체된 후 에쓰오일과 대표팀 훈련장을 전전하던 이정우가 다시 태극마크를 달았다.

5월 도쿄세계선수권(단체전) 8강에서 탈락한 한국탁구가 위기의 순간, 이정우를 선택했다. “그토록 꿈꾸던 올림픽 무대에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 간절할 때는 이상하게 풀리지 않았다. 추천도 되지 않았다. 기대도 안하고 모든 걸 내려놨을 때 기회가 찾아왔다”고 했다.
 

▲ 이미 아시안게임에서도 많은 활약을 해왔던 이정우다. 직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의 이정우.

1984년생 이정우는 소위 ‘낀 세대’다. 선수생활을 시작한 이래 위로는 언제나 ‘걸출한 선배 삼총사’ 오상은 주세혁 유승민이 있었다. 특히 두 살 많은 ‘펜 홀더 전형’ 선배, 아테네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유승민은 따라야 할 길이자 넘어야할 산이었다.

“고등학교 때 태릉에 처음 들어왔다. 같은 펜 홀더 전형인 승민이 형과 두 살 차이가 났다. 형을 보면서 내가 엄청 부족하다고 느꼈다. 따라하려고 노력했고, 체력, 정신력에서 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비슷하게라도 쫓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실력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밑에서는 ‘차세대’ 후배들이 거침없이 치고 올라왔다. 광저우아시안게임 직후인 2011년 로테르담세계선수권부터 김민석 정영식 이상수 서현덕 정상은으로 대표되는 차세대들에게 기회가 넘어갔다.

‘낀 세대’의 운명 속에서도 이정우는 질기게 살아남았다. 이정우는 집중력이 뛰어난 선수다. 결연한 눈빛으로 작심하고 나선 대회에선 반드시 성적을 냈다. 농심 해체설이 파다하던 지난해 이정우의 투혼은 인상적이었다. 연말 제67회 전국남녀종합탁구선수권에서 펄펄 날았다. 단식 준우승, 복식 우승의 쾌거를 빚어냈다. “나는 안했으면 안했지 일단 나가면 잘해야 한다. 팀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농심 창단 멤버로서 마지막 시합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했다. 농심 해체 직후 출전한 지난 6월 인천 코리아오픈 단식에서도 남자선수로는 유일하게 8강에 올랐다.
 

▲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단체전 은메달 주역이다. 단체전에 강한 이정우가 꼭 필요한 대표팀이다.

이정우는 자타공인 ‘독종’이다. “스스로에게 지는 걸 싫어한다. 몸 만들고, 올릴 때 누구보다 악착같이 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펜 홀더라는 전형은 기술적으로 한정돼 있다. 결국 많이 움직여야 한다. 나만의 작전도 10개 이상 늘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정우는 ‘이기는 법’을 아는 선수다. “체력 소모가 큰 만큼 준비가 안 돼 있으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다. 1년 내내 모든 대회를 100% 준비하기는 쉽지 않다. 마음먹고 이겨야 할 때는 승률이 높았다. 컨트롤이 가능하다.”


► 파란만장 탁구인생, ‘왼손 펜 홀더’의 이름으로

석전초등학교 시절 이정우는 전국을 호령하던 ‘절대 에이스’였다. 전국대회 5관왕을 휩쓸었다. 영리하고 빨랐다. 공부도 제법 잘했다. 수학경시대회에 학교대표로 뽑혀 나갈 정도였다. 부모님의 만류 속에 탁구를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탁구부 동료들이 마산 합포중학교에 함께 진학하려면 ‘에이스’ 이정우가 필요했다. 그러나 중학교 이후 단식에서 좀처럼 우승하지 못했다. 2~3위에 머물렀다. 창원 남산고 진학 이후 슬럼프가 깊어졌다. “어떻게 해야 이기는지, 어떻게 훈련해야 할지 알지 못했던 시절”이다. ‘먹고 살려면 기술이나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좌절했다. 탁구를 놓으려던 순간, 탁구가 이정우를 붙잡았다. 고2때인 2001년 아시아주니어탁구선수권 단식에서 깜짝 우승했다. 류지혜 김무교 등 여자 에이스들의 파트너로 태릉에 입성한 이정우의 기량은 일취월장했다.

2003년 실업팀 농심에서 ‘왼손 펜 홀더’ 유남규 감독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탁구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유 감독님은 금메달리스트로서의 경험담을 많이 들려주셨다. 스무 살 무렵 감독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유명해지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태릉에서 외박도 안 나가고 탁구에만 미쳤었다.” 우직한 노력은 통했다. 1년 만에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선배’ 유승민을 넘었다. “승민이 형을 처음 이긴 게 2004년 전국체전이다. 아테네올림픽 금메달 직후 삼성과의 단체전 첫 경기에서 승민이 형을 꺾었다. 이후로도 4~5번 이겼다.”

유 감독과의 눈빛 호흡은 최강이었다. “유 감독님과 기술적으로 같은 전형이니까, 잘 통했다. 나는 감독님께 확률탁구를 배웠다. 지략싸움, 작전능력에서 단연 최고였다”고 했다. 유 감독이 플레잉코치에서 감독이 된 2005~2006년 이정우의 탁구는 만개했다. 이정우가 출전한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대한민국은 늘 4강 이상의 성적을 냈다. 2005년 이후 선배 오상은과 손발을 맞춘 오픈대회에서 무수히 많은 복식 메달을 따냈다. 2005년 독일오픈, 스웨덴오픈 남자복식에서 연거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005년 중국오픈 남자단식에선 준우승했다. “몸도 좋고, 내 탁구에 자신이 있었다.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제일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진다는 생각을 안했던 시절”이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타고난 재능, 부단한 노력으로 끌어올린 클래스는 이후에도 꾸준히 유지됐다. 2007년 코리아오픈 남자복식 우승, 2011년 스페인오픈 남자복식 우승, 2012년 스페인오픈 남자단식 준우승, 2013년 코리아오픈 남자복식 준우승에 이르기까지, 톱랭커 선배들의 틈바구니에서 이정우는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왔다. 셰이크핸드 전형이 대세를 이룬 한국 탁구대표팀에서 마지막 남은 ‘왼손 펜 홀더’의 자존심을 걸었다. 팬들은 1m82의 신체조건, 전광석화처럼 빠른 풋워크, 날카로운 서브와 파워풀한 포어드라이브, 영리한 3구 공략, 포기하지 않는 투혼으로 이정우를 기억한다.
 

▲ 마음 먹으면 반드시 해내는 이정우다. 팀 해체의 기로에 서있었던 지난해 종합선수권에서 이정우는 투혼의 플레이를 펼쳤었다.


세 번째 아시안게임,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하란 의미일까

이정우는 농심삼다수 탁구단의 창단멤버다. 젊음을 바친 일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지난 3월 농심은 공식 해체를 선언했다. 함께 땀 흘리던 선후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해묵은 이정우의 짐들은 구로 오피스텔 단지에 있는 누이동생 집과 절친의 집에 나뉘어 맡겨졌다. 인천아시안게임이 끝나고 나면 이정우는 돌아갈 팀이 없다.

이정우는 ‘무적’ 상태로 인천아시안게임에 나선다. 가장 힘든 상황에서 도전의 기회가 기적처럼 찾아왔다. 창단멤버로서 팀을 지켜내지 못한 회한과 설움은 겪어보지 않은 이는 모른다.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진짜 힘들게 운동하고 있다.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 때면 가끔 내가 왜 여기서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이미 아시안게임 메달은 땄는데 메달을 더 딴다고 내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을까. 이런 회의가 들 때도 있다”고 깊은 속내를 털어놨다. “아시안게임이 끝나면 여동생 집에서 지내야 한다. 금메달을 딴다고 해도 포상금을 줄 팀도 없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잘하면 좋은 팀에서 나와 내 후배들을 모두 함께 불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꾼다. 좋은 팀으로 후배들과 함께 가고 싶다”고 했다. “나도 팀이 있으면 좋겠다. 소속팀 동료들과 회식도 하고, 응원도 받고, 헹가래도 받고 싶다. 그래서 지금 더 힘을 내고 있다.”
 

▲ 종합대회에서 팀 후배 최원진과 복식을 우승했다. 아시안게임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다면 후배들과 다시 한 팀에서 뭉칠 수 있을까?

이정우는 ‘팀플레이어’이자 ‘언성히어로’다. 가장 만족스러운 경기, 소위 ‘인생게임’을 묻는 질문에 대한 이정우의 대답은 인상적이었다. “브레멘세계선수권도 그렇고, 아시안게임도 그렇고, 내가 나선 단체전에서 늘 4강까지는 갔다. 광저우세계선수권에서도 결승전에서 마롱한테 진 한 경기가 유일한 패배였다. 나는 특정 대회, 특정 경기보다 대한민국 탁구의 이름으로 나선 모든 단체전에서 내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가장 뿌듯하게 생각한다.”

이정우의 탁구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 때문에 목말랐고, 원치 않은 선택들에 휘둘리며 가슴 아팠다. 잡아야 할 기회를 잡지 못했고, 기회는 불쑥불쑥 예고 없이 찾아왔다. 늘 최고는 아니었지만, 늘 최선이었다.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오롯이 지켜왔다.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내 위치를 유지한 것에 대해 만족한다. 외부환경 때문에 무너지고 싶지는 않았다. 악착같이 질기게 버텨온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며 미소 지었다. “시련 속에 인생 공부도 많이 했다. 이젠 웬만한 일들은 웃고 넘길 수 있는 내공이 쌓였다.”

9월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왼손 펜 홀더’ 이정우의 무한도전이 시작된다. 이정우가 나서는 단체전, 혼합복식은 대한민국 탁구의 전략종목이다. 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길이 시작될 것이다. 서른 즈음에, 다시 ‘마지막’이 아닌 ‘시작’을 꿈꾼다.
 

▲ 서른 즈음에, 다시 ‘마지막’이 아닌 ‘시작’을 꿈꾼다.

글 전영지(스포츠조선 스포츠팀) | 사진 안성호

(월간탁구 2014년 9월호)

* 본 기사는 탁구전문지 월간탁구에 게재된 <전영지의 인물 탐구>중 일부분입니다. 함께 게재된 ['왼손 펜 홀더' 유남규 남자대표팀 감독이 말하는 '애제자' 이정우] 등 더 많은 내용들은 월간탁구 2014년 9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더 핑퐁]에서는 오프라인 [월간 탁구] 독자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매월호에서 주요기사 한 꼭지만을 발췌하여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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