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탁구연맹(ITTF) 월드투어 2019 코리아오픈

“아빠! 나 1대 1, 10대 7에서 졌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유빈이 아빠’ 신수현 씨(수원시탁구협회 전무)는 각종 탁구대회에서 아나운서로도 자주 활약합니다. 현재 부산 사직체육관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탁구연맹(ITTF) 신한금융 2019 코리아오픈 국제탁구대회도 진행을 담당하고 있죠. 아나운서들은 경기 일정을 빼놓지 않고 따라가야 하므로 늘 가장 늦게 경기장을 나서게 되는데, 하루 동안의 경기결과를 정리해 업데이트하는 기자들과 동선이 겹치게 마련입니다. 자연스럽게 같은 차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거나 늦은 시간에 식사를 함께 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요.

어느 ‘아빠와 딸’의 통화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것도 3일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함께 이동하던 차 안에서였습니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아빠는 신수현 전무, 딸은 그 유명한 ‘탁구신동’ 신유빈입니다. 이들 부녀에게 3일은 특별한 하루였습니다. 아나운서인 아빠의 호명을 따라 경기장에 등장한 딸이 열심히 승부를 펼쳤죠. 사실 이런 경우가 그리 드문 일이 아닌데도 특별했다고 하는 이유는 이날 유빈이의 경기내용 혹은 결과 때문입니다.
 

▲ (부산=안성호 기자) 신유빈은 여자단식 예선 3회전까지 진출했다.

여자단식 예선에 출전한 유빈이는 2회전에서 세계랭킹 64위인 룩셈부르크 선수 드뉴테 사라를 4대 2(10-12, 11-6, 6-11, 11-8, 11-4, 12-10)로 이긴 뒤 중국의 류웨이샨과 3회전을 치렀습니다. 류웨이샨은 국제무대에는 거의 처음 모습을 보였지만, 오성홍기를 가슴에 달고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묵직한 존재감을 갖는 중국 선수입니다. 2회전에서는 홍콩의 차세대 에이스로 꼽히는 수와이얌미니를 완파하면서 이미 강자의 본색을 드러냈고요.

아빠는 딸이 중국의 복병을 상대로 예선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되자 무척이나 떨렸는지 경기를 제대로 쳐다보기도 힘들어 하더군요. 유빈이가 첫 게임을 단 1점만 따낸 채 허무하게 내주자 아빠의 한숨도 더 깊어졌고요. 그런데 유빈이는 두 번째 게임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포어 백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격했고, 코스를 지키면서 상대의 힘을 역이용할 줄도 알았습니다. 힘도 속도도 밀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상대를 5점에 묶어둔 채 게임을 가져오는 데 성공했죠.
 

▲ (부산=안성호 기자) 3라운드 승부는 아쉬웠다. 잘 싸웠지만 뒷심이 달렸다.

문제는 이어진 세 번째 게임부터! 유빈이는 2게임 때처럼 적극적인 플레이로 앞서나갔고 게임포인트에도 먼저 도달하면서 승기를 잡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중국이더군요. 게임을 내줄 위기 속에서도 류웨이샨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플레이를 고수하며 한 점 한 점 따라붙더니 끝내 듀스에 역전승을 해버렸습니다. 다음 게임, 또 그 다음 게임도 양상은 비슷했죠. 초반 앞서가던 유빈이는 상대가 따라붙자 조금은 소극적으로 지키려는 모습을 보였고, 류웨이샨은 강한 힘이 실린 공격으로 판을 뒤집었습니다. 모든 랠리에서 쉽게 끝나는 법 없이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지만, 그 미세한 차이가 포인트를 갈랐습니다. 결국 뒷심이 달렸던 유빈이의 1대 4(1-11, 11-5, 11-13, 8-11, 7-11) 패배로 경기가 마무리됐고요.

여자단식 예선 3라운드는 이날의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시합이 끝나자 아빠는 곧 아나운서의 본분으로 돌아와 일정을 마무리했지만, 딸의 패배에 대한 아쉬움만은 어쩔 수 없었는지 계속해서 깊은 한숨을 마이크 아래로 숨겼죠. 지긴 했지만 유빈이는 이날 어느 때보다도 훌륭한 경기력을 선보였는데, 아빠의 안타까움은 아마 그래서 더 깊지 않았을까요. 딸의 전화가 걸려온 시점이 바로 예의 아까웠던 시합을 곱씹으며 숙소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 (부산=안성호 기자) 경기 직후 유빈이의 표정에도 아쉬움이 짙게 서렸다. 앞은 유남규 여자대표팀 감독.

딸은 아빠에게 일종의 책망을 요구하는 것 같기도 했고, 위로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혹은 칭찬을 원했던 건지도 모르죠. 통화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음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자세히 들을 순 없었지만, 첫 세트(게임) 훅 지나가서 당황했고, 2세트부터는 할 만했고, 내용은 나쁘지 않았는데 밀려서 아까웠고 이런저런 경기에 관한 내용이 주였다는 건 아빠의 대답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빠와의 전화를 통한 ‘복기’가 아직 어린 선수 유빈이에게는 작지 않은 힘이 될 거라는 짐작도 물론 함께였죠. 어떤 ‘선생님’한테 “다음에 만나면 이길 수 있어”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아빠는 “오늘 경기 너무 잘해줘서 아빠 행복해”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죠.

최근 신유빈은 탁구계 최고의 ‘이슈메이커’입니다. 안 그래도 ‘신동’으로 유명했는데, 얼마 전에 있었던 아시아선수권대회 파견 대표 선발전에서 역대 최연소 여자 국가대표가 되면서 더 큰 기대를 모으고 있죠.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기로 했다는 한 언론의 기사가 코리아오픈이 열리는 중에도 내내 화제가 되고 있을 만큼 신유빈의 일거수일투족에는 많은 이들의 시선이 따라붙습니다. 갓 만 열다섯 살이 된 어린 선수가 감당하기가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부녀의 전화통화가 각별한 느낌으로 남은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 (부산=안성호 기자) 유빈이 아빠 신수현 전무. 코리아오픈 장내 아나운서를 맡고 있다. 옆은 안수민 아나운서.

세상에 그렇지 않은 아빠는 없겠지만, 옆에서 지켜본 신수현 씨는 정말이지 유빈이를 위하는 아빠입니다. 속으로 아쉬워할지언정 성적에 대한 욕심을 절대로 딸 앞에서 내색하는 법이 없고, 본인도 실업 선수 출신이지만 탁구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유빈이의 뜻에 맞춰주려고 노력합니다. 고등학교를 가지 않기로 한 결정도 “좀 더 탁구를 많이 하고 싶다”는 유빈이의 희망에 따른 거라고 하더군요. 혹시 부모의 욕심이 개입된 결정이라고 오해하는 이도 여전히 있을 법한데, 이것만은 100% 믿어도 좋습니다. “딸이 하고 싶은 거 열심히 하는 모습 볼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아빠니까요.

물론 아빠도 사람인지라 욕심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일행 중 누군가가 문득 “이제 내일부터는 진짜들이 나온단 말이지!”하고 본선 경기에 대한 기대감을 표했는데, 신수현 전무가 또 한 번 아쉬운 표정으로 “그 진짜들 중에 끼었으면 좋았을 텐데”했거든요. 하지만 뭐 ‘진짜’가 별 건가요. 게다가 유빈이는 이제 열다섯 살이고 본선에도 거의 오를 뻔했습니다. 4일부터는 경기장이 아닌 관중석에서 응원을 하게 되겠지만 아마도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경기장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지 않을까요? 예선 통과, 본선 진출 상관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거 열심히 하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말 그대로 전폭적인 응원을 보내는 가족의 사랑도 뒤에 있습니다.
 

▲ (부산=안성호 기자) 국가대표 '신유빈'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코리아오픈 뒤에 이어질 호주오픈에도 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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