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반 고흐 VS 폴 고갱

모네의 <인상 : 해돋이>를 시작으로 인상주의라고 불리기 시작한 화풍은 ‘대충 그렸다’, ‘미완성이다’라는 초창기의 혹평을 극복하고 대중을 사로잡았다. 고갱과 고흐 또한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되지만, 이들은 그 속에서 또 다른 변화를 꾀한 사람들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변화와 새로움을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기에 살아서는 인정받지 못했고, 죽어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다. 
 

▲ 고갱(좌)과 고흐(우)의 자화상.


원시 문화로의 회귀를 그린 화가

고갱(1848~1903)은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기자 생활을 한 아버지를 따라 페루 리마로 이주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 17살부터는 군에 복무하며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고, 전역 후엔 주식 중개인이 되어 다섯 명의 자녀까지 두고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을 시작하면서 직접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를 품게 되었고 1876년부터는 직접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하고 전업 화가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나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데다가 화단에 특별한 연고도 없는 고갱의 작품들은 별로 인기가 없었다. 결국, 경제적으로 빈곤해지고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1886년에는 아내와도 헤어지고 말았다. 
 

▲ 고갱의 <설교 후의 환영, 1888>. 전통 의상을 입은 브르타뉴의 여인들이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의 환영을 보고 기도하는 모습이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표현하기 위한 크기와 색채의 왜곡이 눈에 뛴다.



자신의 작품을 인정해주지 않는 파리에서의 생활에 지친 고갱은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주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에 몰두했다. 또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 섬과 파나마 등지를 여행하며 열대 지역의 색채와 그곳의 원시공동체 생활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의 그림 역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는데 단순·평면화된 형태, 강렬하고 임의적인 색채, 신화적인 감수성이 그림에 나타나게 된다. 이맘 때 고갱의 대표작인 <설교 후의 환영>을 보면 확실히 지금까지의 그림들과는 다른 주제와 구도, 색채를 보여주며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공고하게 다져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바로 이 시기에 고흐와 함께 생활하며 작품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곧 결별한 이후 다시 퐁타방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나 고갱은 더욱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문화와 자연을 가진 곳으로 가길 원했기에 1891년에는 타히티로 떠난다. 그는 타히티에서 원주민들과 어울리며 예술적 영감과 작품 활동의 원동력까지 얻을 수 있었고, 약 2년 동안 그곳에서 그린 그림을 들고 파리로 돌아가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파리는 여전히 고갱의 그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크게 실망한 고갱은 1895년에 다시 타히티로 향하게 된다. 이후 그는 타히티 여성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죽음에 좌절하고, 가난과 질병까지 겪으면서 깊은 우울증에 빠져 고통받는다. 하지만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해변의 기수들>, <미개한 이야기> 등의 작품을 탄생시키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완성해 갔다.


눈부신 빛의 화가

고흐(1853~1890)는 네덜란드 준데르트 지방에서 평범한 시골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취미로 그림을 그렸던 어머니의 곁에서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는데, 16살이 되던 해에는 갑작스레 학교를 자퇴하고 큰아버지와 함께 헤이그에 있는 구필 화랑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직접 야외에 나가 자연과 풍경을 그리는 미술 사조인 바르비종파의 화풍을 가까이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는다. 특히 밀레의 그림에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그의 그림을 자주 습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술품을 두고 손님과 격한 언쟁을 벌이는 일이 잦아지면서 1876년에 화랑을 그만둔다. 
 

▲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1855>. 고흐가 이 그림 이전의 작품들은 그저 습작이었다고 말했을만큼 만족해하던 작품이지만 구성과 비례 등의 회화적 기교가 아직은 미숙하다. 그러나 고흐 특유의 거칠고 독특한 붓놀림,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했던 주제의식은 확실해보인다.



이후 고흐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열망에 신학교에 들어가거나 선교사 생활을 했지만, 자신의 뒤를 이어 구필 화랑에서 일을 시작한 동생 테오의 설득으로 27살이 되던 해부터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또한, 평생 정규 미술 수업을 받은 적은 없었던 만큼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으려고도 했지만, 학교나 강사와 자주 갈등하는 바람에 결국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익히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향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던 고흐가 처음으로 스스로 만족할만한 그림을 완성하는데 그것이 바로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고향 마을에 머물며 밀레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그리는 농민 화가가 되기를 원했던 시기에 그린 이 그림은 원색의 색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분위기의 그림이었다. 고흐는 이 그림이야말로 자신의 첫 ‘작품’이라고 크게 만족하며 테오가 그것을 살 사람을 찾아주길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림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 고흐는 파리로 가서 그동안 테오의 편지로 말로만 전해 듣던 인상주의 그림들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모네, 르누아르, 쇠라, 들라크루아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직접 대면하면서 그 자신도 좀 더 대담하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게 된다. 더불어 일본 판화 우키요에에 깊이 매혹당한 고흐는 그 영향으로 그림자의 생략, 사물의 단순화, 사물을 검은 테두리 선으로 강조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파리에서 머무는 동안에도 그의 그림은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고, 함께 살던 테오에게도 부담을 주게 되자 1988년에 남프랑스의 아를로 이주한다. 이후 고흐는 강렬하고 눈부신 색채로 가득한 남프랑스의 풍경 속에서 2년 후, 세상을 뜨기 전까지 <해바라기>, <밤의 카페 테라스>, <별이 빛나는 밤에>,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 오늘날 유명한 작품 대부분을 완성해나갔다.


두 달 간의 공동 작업

노래하는 사람은 누군가 들어주길 원하고,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며,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그림을 봐주길 원한다. 고갱과 고흐 역시 자신의 그림이 주목받길 원했지만. 정식 미술 교육 조차 받은 적이 없던 두 화가가 주류가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고흐는 언제나 화가공동체를 꿈꿨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대중을 따라가기보다 스스로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나가고, 서로 작품에 대해 토론하고 교류하며 창작 활동을 해나갈 수 있는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했다. 애초에 고흐가 아를로 간 것도 그것을 위해서였기 때문에 그는 여러 화가에게 초대장을 보냈는데 이에 응답한 것은 딱 한 사람, 고갱뿐이었다. 당시 궁핍한 처지였던 고갱으로서는 공동체 생활에 대한 기대보다는 생활비를 지원하겠다는 테오의 제안이 더 반가웠지만, 고흐는 고갱이 온다는 소식만으로도 무척 기뻐했다. 
 

 
▲ 위 작품들은 고갱과 고흐의 그림에 대한 관점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많이 거론되는 것으로 고갱과 고흐가 아를에서 함께 지내던 시절에 자주 가던 카페 주인인 지누 부인을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한 모델을 두고 고흐는 테이블에 책을 두고 창가에 앉게 하여 눈앞에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렸지만(아래), 고갱은 술병과 술꾼들이 있는 카페로 배경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곁눈질하는 눈빛이나 미소를 통해 간사함과 천박함을 지닌 술집 주인으로 표현했다(위). 

하지만 두 사람의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성적이고 음울한 데다가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고흐와 전직 주식 중개인이었던 만큼 어딘가 오만하고 계산적인 면이 있었던 고갱은 기질적으로 섞이기 힘든 면이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그림을 대하는 관점의 차이는 커다란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해 그림을 그리는 고흐와 임의적인 해설과 구도를 잡아 그림을 그리는 고갱은 상대방의 그림에 공감하지 못했다. 결국, 고갱이 아를에 온 지 두 달이 조금 지났을 때 고갱과 말다툼을 한 고흐는 발작을 일으키며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고 그에 충격을 받은 고갱은 미련 없이 아를을 떠나버렸다. 이후 정신병원을 들락거리게 된 고흐는 1890년, 슬픔과 고독,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들판에서 총으로 자살을 기도했고 이틀 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예술과 문화는 항상 진보를 지향하며 기존의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고갱과 고흐 역시 언제나 변화를 꾀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화가들이었다. 고갱과 고흐의 시대에 이들의 새로운 시도들은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끝끝내 무명화가로서 생을 마쳤지만, 그러한 시도들이야말로 이들이 현대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가 되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월간탁구 2017년 6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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