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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액션 배우의 대를 잇다라이벌 열전> 이소룡 VS 성룡
서미순 기자  |  redri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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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20  10: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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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의가 붙은 노란색 옷만 봐도 우리는 이소룡을 떠올린다. 쌍절곤 역시 이소룡의 상징이다. 이소룡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패러디되고 오마주 된 인물 중 한 하나일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그만큼 그의 사후 빈자리는 쉽게 채워지지 못했다. 술병을 손에 쥐고, 술에 취한 채 악당을 때려눕히는 성룡이라는 배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술가에서 영화배우가 된 이소룡

이소룡(1940~1973)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것은 유명 경극 배우였던 아버지의 미국 순회공연에 동행했던 어머니가 그곳에서 출산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공연 일정이 끝나고 출생 3개월 만에 홍콩으로 돌아간 이소룡은 약한 몸을 단련하기 위해 7살부터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당시 무술 고수로 이름을 떨치던 엽문에게 영춘권을 배웠는데 이는 후에 이소룡 표 무술이라고 할 수 있는 절권도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라면서 말썽을 부리고 싸움질을 하는 일이 잦아지자 부모들은 그를 미국에 보내기로 한다. 홍콩에서 퇴학과 입학을 번갈아 하느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 이소룡


1959년에 부모님에게 받은 100달러를 손에 들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소룡은 시애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워싱턴 대학에서 철학, 연극, 심리학 등을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쿵푸 교습을 시작했다. 또한, 영춘권을 포함해 복싱, 유도, 태권도, 당수, 펜싱 등 다양한 무술을 접해왔던 이소룡은 이를 기반으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좀 더 실용적인 자신만의 무술 세계를 만들고 연마해 나갔다. 한동안 그렇게 무술 연마에만 힘을 쏟았지만 어릴 때부터 배우였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TV와 영화에 출연했던 그는 연기로 성공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인종 차별의 벽이 높던 미국에서 동양인인 이소룡에게 그 꿈을 향한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지만 뛰어난 무술실력으로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히어로 드라마 ‘그린 호넷(1966)’에서 조연인 ‘케이토’ 역할로 데뷔하게 된다. 하지만 드라마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금방 종영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이소룡은 계속해서 TV와 영화계의 문을 두드렸지만 동양인인 데다가 투박한 영어 발음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홍콩 영화계는 이소룡을 뜨겁게 맞이했다. 미국에서 한 시즌밖에 방송되지 않았던 ‘그린 호넷’이 자국 배우의 출연에 힘입어 중화권에서는 큰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이소룡은 이제 막 명성을 얻기 시작한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와 두 편의 영화 계약을 맺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영화가 바로 ‘당산대형(1971)’이었다. 이소룡이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던 이 영화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실적인 액션을 선보이면서 홍콩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작으로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당산대형’의 놀랄만한 흥행기록은 불과 일 년만에 ‘쌍절곤’과 ‘아뵤’라는 기묘한 기합 소리로 무장한 이소룡의 두 번째 영화 ‘정무문(1972)’으로 깨져버리지만 말이다.


배우가 되기 위한 사람, 성룡

어머니의 뱃속에 12개월이나 머물러 있는 바람에 덩치가 커져서 수술로 태어났다고 하는 성룡(1954~)은 극심한 가난 때문에 일찍부터 부모 곁을 떠나 자라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양친이 요리사와 가정부로 해외 취업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7살이 되던 해에 경극 학교에 맡겨진 성룡은 매일 이른 새벽부터 무술과 연기를 수련하며 10년이란 시간을 보내게 된다. 후에 고문과 같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경극 학교에서의 생활은 혹독했지만, 이곳에서 든든한 선후배(홍금보, 원표, 원화 등)를 만나 평생 영화계에서 동거동락하게 된다. 
 

   
▲ 성룡은 ‘취권’으로 홍콩 영화의 흐름을 단숨에 바꿔놓았다.


성룡은 스턴트맨과 단역으로 연기를 시작하지만 배우로서의 성공은 쉽지 않아 보였다. 한 때, 배우를 포기할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이소룡과 ‘당산대형’, ‘정무문’을 만든 나유 감독이 주연급 배우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오디션에 참가하여 합격하게 된다. 하지만 그때는 이소룡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로, 이소룡 영화의 아류작으로밖에 볼 수 없는 영화들이 마구 쏟아지던 홍콩 액션 영화의 침체기였다. 성룡 또한 자신에게 맞지 않는 비장하고 심각한 이소룡식 영화들을 여러 편 찍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나유 감독이 ‘작은 용(소룡)’을 뛰어넘어 ‘어른 용(성룡)’이 되라고 호기롭게 지어준 이름도 공허하게만 느껴지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사형도수(1978)’라는 영화의 주연 배우가 스케줄 문제로 하차하게 되자 성룡이 그 자리를 꿰차게 된다. 오래전부터 코미디와 무술을 접목한 액션 영화를 하고 싶었던 성룡이 비로소 자신의 몸에 맞는 배역을 만난 셈이었다. 그리고 ‘사형도수(1978)’의 성공에 힘입어 연이어 제작된 ‘취권(1978)’은 성룡을 대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이소룡과 성룡

이소룡이 홍콩은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그를 외면했던 할리우드로부터도 러브콜을 받게 된다. 워너 브러더스에서 골든 하베스트와 합작으로 ‘용쟁호투(1973)’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소림사 출신의 주인공이 악명 높은 마약상을 체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 ‘용쟁호투’에는 수많은 격투 장면이 등장한다. 주인공을 맡은 이소룡이 적의 본거지에서 수많은 사람을 때려눕힐 때, 그중에는 대역과 엑스트라로 영화에 참가한 무명의 성룡도 있었다. 주인공에게 맞고 쓰러지는 역할을 맡았던 성룡은 이소룡의 실수로 눈가에 부상을 입고 마는데 이소룡이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다음 영화의 출연 약속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이 약속이 지켜졌다면 성룡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가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소룡은 ‘용쟁호투’가 개봉되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성룡은 이소룡에 의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결국 홍콩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로 성장했으니 아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이소룡의 영향으로 비장하기만 했던 홍콩 액션 영화가 성룡의 코믹 액션 영화 ‘취권’으로 반전되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놓았으니, 성룡의 성공은 곧 홍콩 영화계가 이소룡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된 셈이다. 
 

   
▲ 이소룡과 성룡은 영화 ‘용쟁호투’에서 주인공과 엑스트라로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에게 영화배우로 기억되는 이소룡은 33년 평생의 마지막 2년만을 배우로 살았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의 이소룡은 오히려 철저하게 무술가로서의 철학과 소신으로 살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권투, 킥복싱, 당수, 우슈 등의 격투기 선수들로부터 최고라는 찬사를 받아왔고 무엇보다 ‘절권도’의 창시자로 무술가로서의 확고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저 신체적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신적 능력까지 계발하려고 했던 사상가이기도 했다. 

   
▲ 성룡의 영화는 현재진행중이다. 최근 개봉한 ‘쿵푸요가’로 건재함을 자랑하고 있다.

성룡 또한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특유의 코믹한 영화들로 인해서 그의 무술이 다소 가벼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네스북에 ‘현재 살아 있는 배우 중 스턴트 액션을 가장 많이 한 사람’으로 기록될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는 과감한 액션과 스턴트를 선보일 때면 성룡이 ‘영화’를 만드는 작업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성룡은 그야말로 뼛속까지 영화를 위해 살아온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스크린을 통해 무술을 선보이는 두 배우를 보며 사람들은 종종 ‘이소룡과 성룡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하는 호기심을 품곤 한다. 그러나 이들의 대련은 처음부터 ‘용쟁호투’였을 지도 모르겠다. 용과 호랑이가 싸우는 막상막하의 싸움이 아니라, 하늘에 사는 용과 땅에 사는 호랑이처럼 다른 분야에서 각자의 막강함을 자랑하는 두 사람이라는 소리다. 

<월간탁구 2017년 4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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