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세종 VS 정조

철저한 신분제를 고수했던 조선 시대의 왕들은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쥔 절대 군주였다. 그 때문에 왕 본인이 정도를 벗어나게 되면 폭정을 저지르거나, 왕의 측근들이 권력을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절대 권력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백성을 섬기며 사랑했던 왕들도 있었다. 현대까지 사랑받는 세종과 정조가 바로 그들이다.
 

▲ 세종과 정조의 어진


어쩌면 왕이 되지 못했을 사람들

세종(1397~1450)은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천재적인 인물 로 꼽힌다. 어마어마한 독서량을 자랑하고, 해박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를 기반으로 정치, 경제, 국방, 문화 등 다방면에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무엇보다 세종은 그 모든 일을 백성을 위해 추진해 나간 진정한 성군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왕이라는 자리가 처음부터 세종에게 허락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장자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유교적 원칙 아래 세워진 나라였고 세종은 장자가 아닌 세 번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인 태종은 자신이 아직 건재하던 시기에 직접 왕위를 물려준 것은 물론 왕위 이양 후에는 아들의 왕권을 강화하는 일에 힘썼는데, 이는 세종이 조선이란 나라를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 세종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물이다. 광화문 광장 중앙에는 세종의 동상이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은 훈민정음.



조선왕조에서 또 한 명의 천재로 불리는 정조(1752~1800)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인물이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영조의 두 번째 아들이었으므로 순리대로라면 왕위는 큰아버지였던 효장세자의 몫이었지만 효장세자가 10살 때 사망하면서 왕위는 사도세자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왕이 되기도 전에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고 만다. 그 죽음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친 노론 벽파 세력은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정조를 견제하며 즉위를 원치 않았는데 그들과 손자의 갈등을 걱정한 영조가 정조를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며 보호하려 했을 정도다. 결국, 영조의 염려대로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세력들과는 척을 지게 된다. 하지만 정조는 그 와중에서도 영조의 탕평 정치를 이어간다. 붕당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갈등을 줄이고 각 세력 간의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을 계속한 것이다.


끊임없이 소통하는 왕

세종은 국정 운영을 위해 신하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대화한 왕이었다. 확신이 있는 정책일지라도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면 무리하게 밀어붙이기보다 그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고, 날카로운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역정을 내기보다 일단 경청하며 대화를 시작하곤 했다. 어릴 적부터 독서광이었던 세종은 책 한 권을 수십에서 일 백 번까지 반복해서 읽었다고 하는데, 단지 책을 읽고 외우는 수준이 아니라 여러 책의 내용을 정리하고 비교 분석하는 능력까지 갖춘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신하들은 언제나 귀를 열어놓은 세종에게 다양한 의견을 내놓는 데에는 주저함은 없었지만, 그의 뛰어난 학식에 기가 눌리는 일은 많았다. 

정조 역시 세종과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잠을 줄이고 밤을 새우면서까지 독서를 할 정도의 다독가였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신하들의 학문을 뛰어넘는 왕은 세종과 정조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정조는 국정을 의논하던 신하들과 격한 언쟁을 벌이는 일이 많았는데 이는 먼저 경청하고 신하들과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세종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특히 정조는 혈기 왕성한 성격에 다변가였던 만큼 자신의 원하는 바를 결정하면 이를 관철하기 위해 현학적이거나 거친 말들로 신하들의 기를 죽이곤 했다. 

▲ 지난 2009년에 공개된 정조의 편지는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심환지에 보내진 것으로 6년 동안 무려 299통에 달한다. 덕분에 그동안 노론 벽파 세력에게 씌였던 정조 독살 혐의를 부정하는 쪽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정조가 자신의 정적이자 아버지 사도세자를 제거한 노론 벽파의 수장인 심환지에게 수백 통의 서찰을 보내 자신의 심정이나 괴로움을 호소하곤 했다는 사실이다. 표면상으로는 척을 지는 듯했지만, 편지로 남몰래 국정을 의논하고 입을 맞추며 정책을 추진해 나갈 정도였으니 노론 벽파 세력 역시 정조에겐 중요한 국정 파트너였던 셈이다. 게다가 노론 시파의 채제공 역시 정조의 편지를 자주 받아보던 인물이었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정조에게 편지란 탕평책을 시행하는 또 하나의 수단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백성을 사랑하는 왕

애민 정신은 세종의 업적을 설명하는 가장 상징적인 말이다. 세종이 한 모든 일이 애민 정신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도 문맹의 백성들이 글을 깨우치게 하기 위함이었고, 문맹에서 벗어난 자들이라면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각종 서적을 편찬해냈다. 또한, 세종은 백성들의 생업인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직접 농법과 기후를 연구했고, 안정된 생활을 위해 국경선을 지키는 일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모든 것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다(세종실록)’는 신념에 의한 것이었다. 

▲ 화성의 성곽은 여러 번 꺾어지고 휘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성의 평면이 마치 나뭇잎 같아 ‘나뭇잎 성’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는 화성을 지을 때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설계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이런 세종과 정조 사이에는 약 35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존재한다. 따라서 정조에게 세종이란 역사책으로만 만나볼 수 있는 먼 조상님이었을 것이다. 정조가 세상을 뜬 것이 지금으로부터 불과 약 200여 년 전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세종과 정조의 시대가 얼마나 달랐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에게 세종은 단순한 조상님이 아닌 자신이 본받고 싶은 롤모델이었던 것 같다. 이는 정조가 집현전을 본뜬 규장각을 만들어 학문을 연구하고 다양한 인재를 등용한 일이나, 조선 최초의 조립식 활자본인 갑인자를 본뜬 정유자를 개발해 대대적인 출판사업을 계획하고 이를 통해 문화 정치를 이끌어나가려던 것을 보면 확실해 보인다. 무엇보다 정조는 세종처럼 백성을 사랑한 왕이었다. 자신의 최대 숙원이던 수원 화성을 만들 때도 설계를 여러 번 변경하면서까지 민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고, ‘백성들은 나의 자식이고, 백성들이 내게 호소하는 것은 부모에게 호소하는 것과 같다’며 백성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려고 노력했다. 

흔히 조선 전기의 왕들은 세종을 본받으려 했고, 조선 후기의 왕들은 정조를 본받으려 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들의 천재적인 재능과 초인적인 노력을 본받으려 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과 후손이 더욱 행복한 나라에서 살기 원했던 꿈을 본받으려 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를 위해 부국강병의 나라, 백성이 행복한 나라, 문화가 융성한 나라를 만들려 했던 두 사람의 꿈과 노력이 현대의 정치 지도자들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를 바란다. 

<월간탁구 2017년 3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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