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뒤셀도르프 제54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개인전

<전영지의 인물탐구>

‘무공 일병’ 이상수의 동메달 무용담
2017 뒤셀도르프 제54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개인전


올해 초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한 이상수가 세계선수권에서 큰일을 냈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10년 만의 세계탁구선수권 개인단식 메달을 획득하고 금의환향했다. 귀국 직후 전영지 스포츠조선 기자가 문경 국군체육부대를 찾아 훈련 중인 이상수를 따로 만났다. “할 수 있습니다”를 주문처럼 외우던 ‘긍정청년’ 이상수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의 무용담이다.
 

▲ 세계대회 시상대에서 거수경례를 사진으로 남기지 못해 아쉬웠다는 ‘무공 일병’ 이상수다.

 “이상수 일병, 정말 큰일을 해냈네.” “네에! 그렇습니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10년 만의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개인단식 동메달을 획득하고 자대 복귀한 ‘일병’ 이상수(27·국군체육부대, 세계랭킹 13위)의 우렁찬 대답에 국군체육부대 포상식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4박5일’의 이례적인 특별휴가를 명한 곽합 부대장의 격려에 “아닙니다!” 대신 훈련소에서 입에 익은 “네에! 그렇습니다!”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너무 긴장했다. 부대장님 앞이 세계선수권 4강전보다 더 떨린다”며 웃었다.
  올해 초 상무에 입대한 직후 세계선수권에서 큰일을 냈다. “할 수 있습니다”를 주문처럼 외우던 ‘긍정청년’ 이상수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이상수는 “입대 후 마음이 가벼워졌다. 군인답게 정신적으로도 강해졌다”고 했다. “군대에서의 일상은 긴장의 연속이다. 오히려 시합이 더 편한 경우도 있다. 경기를 하면서도 더 신중해진다”고도 했다. 6월 중순 여름볕이 따스한 경북 문경, 국군체육부대에서 ‘닥공 일병’ 이상수의 세계선수권 ‘무용담’이 시작됐다.
 

▲ 밝은 표정으로 뒤셀도르프에서의 무용담을 전해준 이상수.

‘세계선수권 사나이’ 이상수
  이상수가 세계선수권 남자단식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탁구가 유승민 IOC선수위원(2007년 자그레브) 이후 무려 10년 만에 세계대회 단식 메달을 획득한 감격의 순간이었다.
  강력한 공격으로 전 세계 에이스들을 무력화한 ‘일병’ 이상수의 분투는 경이로웠다. 32강에서 2011-2013년 세계선수권 2연패, 런던올림픽 단식 금메달에 빛나는 장지커를 꺾었다. 16강에서는 ‘벨로루시 백전노장’ 삼소노프를, 8강에선 ‘홍콩 톱랭커’ 웡춘팅을 돌려세웠다. 세계선수권 개인전 입상 스토리도 이어갔다. 첫 출전이었던 2013년 파리에서 박영숙(렛츠런)과 혼합복식 은메달, 2015년 쑤저우에선 서현덕(상무)과 남자복식 동메달을 땄다. 2017년 뒤셀도르프에서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정영식(미래에셋대우)과 합작한 남자복식 동메달에 이어 단식에서도 한국탁구의 자존심을 세웠다. 3번의 세계선수권에서 4개의 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상수는 남자 단식 복식에서 메달을 따낸 유일한 선수로 기록됐다.
  “나도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다. 오히려 영식이와의 복식에서 금메달을 기대했다. 결승까지 못간 게 지금도 아쉽다”고 했다. “단식에서 이렇게 잘할 줄은 나도 몰랐다. 공이 잘 맞아서 스스로도 놀랐다”고 했다. “일단 장지커까지 가자 생각했다. 매 경기 ‘그저 한 경기일 뿐’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한 경기 한 경기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 이상수는 “입대 후 마음이 가벼워졌다. 군인답게 정신적으로도 강해졌다”고 했다. 상무의 동료들과 함께. 왼쪽부터 박찬혁, 천민혁, 최덕화, 이상수, 강동수, 서현덕, 윤주현.

리우, 실패를 통해 배우다
  지난해 리우올림픽, 절친 후배 정영식이 마롱과 대접전을 펼치며 ‘우리 영식이’로 스타덤에 올랐다. 지난 4월 아시아선수권에선 ‘한솥밥’ 정상은(삼성생명)이 단식 은메달을 따냈다. 동료들의 선전은 이상수에게 자극이 됐다. “솔직히 부러웠다. 생각 안하려 해도, 신경 쓰이는 건 있었다. 그래서 연습을 좀 더 했다. 어떻게 하면 내 탁구가 더 발전할까만 생각했다. 이번 대회는 승리도 중요하지만, 스스로는 내용적인 면에서 점수를 주고 싶다”고 했다.
  리우올림픽 전에 탁구인들이 가장 기대한 선수는 이상수였다. 공이 맞는 날이면 마롱, 쉬신도 꼼짝없이 돌려세우는 ‘닥공’에 대한 믿음, 될 때까지 라켓을 놓지 않는 ‘연습벌레’를 향한 기대였다. 하지만 첫 올림픽은 이상수에게 쓰라린 시련이었다.
  이상수는 “올림픽을 위해 가야할 길이 있었는데 그걸 제가 잘못 갔다”고 인정했다. “고집스러웠다. 내 스타일대로 승부 보려고 하는 게 있었다. 빠르게 승부를 보고 싶었다. 상대방이 공격해서 점수를 잃는 게 싫었다. 얻어맞는 게 싫었다. 내가 때리고 싶었다. 상대를 보고 때려야 하는데 세게 날아오는데도 무조건 때리려다 보니, 미스가 많았다.”
  안재형 당시 남자 대표팀 감독과의 일화도 솔직히 털어놨다. “안 감독님이 ‘이렇게 치다 안 통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안전하게 해야 한다’고 조언하셨다. ‘내 스타일대로 하겠다’고 했다. 트러블이 있었다. 감독님은 그래도 믿어주셨다. 안 감독님께 올림픽 후 미팅에서 사과드렸다. ‘감독님이 옳았는데 제가 못 받아들인 게 이런 결과로 이어졌다. 정말 죄송하다.’”
  올림픽 후 이상수는 달라졌다. ‘닥공’을 끈끈하게 지켜낼 ‘안전한 탁구’에 대한 조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주변 조언을 받아들이다 보니 탁구가 좋아졌다. 실패를 통해 배웠다. 올림픽을 통해 얻은 게 많다. 비록 메달은 못 땄지만 내 탁구의 확실한 방향성을 얻었다.”
  세계선수권, 이상수의 동메달은 실패, 변화, 성장의 결실이다. “올림픽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왔다. 50%도 보여주지 못했다. 이번 세계선수권에서는 100%를 하고 왔다. ‘연습한 모든 걸 보여주고 오자’가 목표였다. 한 치의 후회도 없다.”
 

▲ 이상수는 ‘이상수 스타일’을 세계탁구계에 남기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60%쯤? 아직 40%를 더 채워야 한다.

만리장성을 3번 넘은 유일한 20대 선수
  이상수는 중국이 자랑하는 ‘3인방’ 마롱, 쉬신, 장지커를 모두 꺾은 유일한 선수다. 2011년 코리아오픈 32강에서 왼손 에이스 쉬신을 4대 2로, 2012년 코리아오픈 16강전에선 세계1위 마롱을 4대 1로 이겼다. 이번에 장지커까지 격파하며 명실상부 ‘중국 킬러’로 등극했다.
  만리장성을 넘는 비결을 물었다.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때 이겼다. 내 것을 하면 이긴다. 이럴까 저럴까 망설임이 많으면 졌다.” 기술적으로는 어떻게 공략했을까. “마롱과 쉬신은 백핸드가 약해서 백핸드 쪽을 몰았다. 장지커는 달랐다. 포어핸드 쪽으로 가르고, 백 핸드 쪽으로 가르고 코스 변화를 줬다”고 설명했다. 이기는 습관이 장착된 중국 에이스들은 좀처럼 지지 않는다. 지는 경기에선 크게 당황한다. 이상수는 “마롱이 제일 티가 많이 난다. 긴장할 때 표정이 많이 흔들린다. 쉬신이 제일 안 흔들린다. 표정이 잘 안보이더라”고 했다. 이상수가 넘지 못한 유일한 상대 판젠동 이야기를 꺼냈다. “마린, 왕하오, 장지커, 쉬신 모두 제각기 자기 스타일이 있다. 그걸 종합한 게 판젠동이다. 이 선수를 이겨야 금메달을 딸 수 있다. 아직은 내가 많이 부족하다. 더 노력하고 연구해야 한다. 내 탁구가 좀 더 발전한다면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독일에서 가져온 메달을 다시 걸었다. 상무에 있는 동안 한 번 더 올라가겠습니다!

‘이상수 스타일’을 남기고 싶다
  “이상수 스타일을 남기고 싶다.” 중원고 시절인 2008년 싱가포르 아시아주니어선수권에서 중국 옌안을 꺾고 우승한 ‘당돌한 10대’ 이상수는 당시 월간탁구와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이구동성 “올림픽 금메달!”을 외치던 또래들과 달랐다.
  ‘이상수 스타일’을 묻자 “고등학교 때부터 마린의 플레이를 좋아했다. 롱플레이, 무난한 연결은 싫다. 짧게 놓고 테이블 위에서 3구, 5구에서 해결하는 공격적인 플레이를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테이블 위에서 상대의 숨통을 단박에 끊어놓는, 이상수의 ‘닥공’은 이런 것이다. “적어도 테이블 위에서 거는 플레이는 내가 제일 잘한다. 살짝 올라오는 볼을 찬스볼이라고 생각한다. 살짝 나오는 볼을 테이블 위에서 들어가면서 걸 때 득점력이 가장 높다.” ‘이상수 스타일은 어디까지 왔나’라는 질문에 “60%”라고 즉답했다. “서비스와 짧은 볼로 40%를 더 채워야 한다. 판젠동이 하는 기술, 우리도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비스, 회전이 다르다. 서비스는 선수의 트레이드마크다. 좀 더 빠르고 낮게, 변화를 주는 서비스에 대한 욕심이 더 커졌다. ‘필살기’를 더 세밀하게 계발하고 연구해야 한다.”
  ‘반박불가’ 에이스, 소년의 목표는 9년이 지난 지금도 변치 않았다. “지금도 내 목표는 그때와 똑같다. ‘이상수’ 하면 ‘탁구 정말 잘 쳤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무공’ 이상수, 주세혁-유승민의 길을 간다
  이상수의 쾌거를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동고동락한 주세혁 삼성생명 코치, 유승민 IOC 선수위원 등 ‘에이스’ 대선배들이다. 주 코치는 “이상수는 내가 늘 믿는 선수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좋은 선수가 될 것”이라며 기대를 표했다. 유 위원은 독일 현장에서 장지커와의 대결을 직관했다. “장지커를 이긴 후 승민이 형이 ‘끝난 것 아니다. 기뻐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 여기서 끝나면 딱 그만한 선수밖에 안 된다’고 하셨다. 냉정한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선배 주세혁, 유승민의 길은 후배 이상수가 가야 할 길이다. 이상수 정영식 정상은 등은 한때 ‘골짜기 세대’로 불렸다. 20대 중반까지 걸출한 선배들에게 밀려 기회를 잡지 못했다. 지금은 조승민, 임종훈, 안재현 등 될성부른 후배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온다. 그래서 더 절박하고 더 치열하다. 이상수는 “선배들의 업적이 크다보니 무너뜨리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크다. 그 부담감을 이기고자 한발 더 노력한다”고 했다. “그냥 무너질 수는 없다. ‘실력적으로 부족하다’고들 생각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해내면 얼마나 뿌듯하고 좋은 일이냐는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끼리 똘똘 뭉쳤다”고 태릉 탁구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지난해 리우올림픽 때까지 대표팀에서 ‘깎신’ 주세혁과 동행했다. “세혁이 형은 진짜 몸 관리를 잘하신다. 자신만의 준비과정, 데이터 분석, 몸 관리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내가 오래 탁구를 치려면 저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동중-중원고 선배인 유승민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2004년 유승민이 아테네올림픽 단식 금메달을 딴 후 모교를 찾았을 때 ‘14살 꿈나무’ 이상수가 꽃다발을 건넸다. 유승민은 이상수의 오랜 롤 모델이다. “형은 런던올림픽 은메달 때 나이, 부상 등 모든 걸 극복했다. 실전에서 폭발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다. 혼자 개인훈련하실 때 배우고 싶어서 옆에 꼭 붙어 다녔다”고 했다. “인천아시안게임 때는 코치셨는데도 간절함이 남달랐다. 새벽에 혼자 산에 오르셨다. 장수가 전쟁을 준비하듯 공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해야 금메달을 따는구나’ 배웠다”고 덧붙였다. “요즘도 나는 승민이 형 영상을 자주 본다. 나는 닥치는 대로 공격하는데 형은 영리하게 틈을 보신다. 안될 때는 견디면서 할 때도 있고, 기회가 오면 여지없이 밀고 들어간다. 경기운영을 많이 배우고 있다. 나도 승민이 형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
  인터뷰 중 이장호 국군체육부대 정훈실장은 ‘일병’ 이상수의 쾌거에 “‘닥공’ 대신 ‘무공’이 어떠냐”고 즉석 제안했다. ‘무조건 공격!’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군인정신이 살아 있는 ‘무공’이라는 단어가 ‘일병’ 이상수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들 했다.
  ‘무공 일병’ 이상수는 뒤셀도르프 세계선수권 남자단식에서 유일한 비중국인 선수로 4강에 올랐다. 마롱, 판젠동, 쉬신과 나란히 시상대에 섰다. 오성홍기 사이에 태극기가 펄럭였다. “군인 신분으로 태극기를 독일 하늘에 올리게 돼 더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지켜봐라. 지금은 여기 서 있지만 언젠가 내가 가장 높은 곳에 서고 말겠다.’ 패기만만한 다짐도 되새겼다. 오성홍기가 나란히 걸린 탓에 거수경례를 사진으로 못 남긴 것은 두고두고 아쉽다.
  ‘무공 일병’ 이상수는 의미심장한 약속을 했다. “한 번 더! 국군체육부대에서 뛰는 동안, 꼭 한 번 시상대에 다시 올라가겠습니다.” (글_전영지(스포츠조선 기자) | 사진_안성호 | 월간탁구 201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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