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뒤셀도르프 제54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폐막까지 이틀만을 남겨두고 있는 2017 뒤셀도르프 제54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한국탁구와 일본탁구의 위상이 완전히 역전됐음을 절감케 하는 마당이 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 한국탁구는 거의 유일하게 중국탁구에 대적할 수 있는 ‘최소한 세계 2강’이라는 자부심으로 버텨왔었다. 실제로 한국은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 등 주요 메이저 이벤트에서 중국 다음으로 많은 메달을 획득해온 나라였다. 그 같은 자부심은 일본이 장기적 투자를 바탕으로 꾸준한 성장을 이루고, 최근 열린 각종 대회들에서 한국보다 좋은 성적을 내는 동안에도 곧 일본만은 다시 추월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자신감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 (뒤셀도르프=안성호 기자) 이번 대회 첫 번째 금메달을 일본의 요시무라 마하루-이시카와 카스미 조가 가져갔다.

하지만 현재 독일에서 치러지고 있는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더 이상 그와 같은 막연한 자신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선 일본은 이번 대회에서 가장 먼저 메달이 결정된 혼합복식에서 이미 금메달을 가져갔다. 2년 전 쑤저우에서 은메달을 따냈던 요시무라 마하루-이시카와 카스미 조가 결승전에서 타이완의 첸치엔안-쳉아이칭 조를 이겼다. 이번 대회 혼합복식에 중국은 주전 조를 내지 않았다. 남자대표 팡보가 독일의 쏠야 페트리사와 연합조를 꾸려 출전한 것이 다였다(이들은 동메달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이전까지대로라면 한국이 당연히 금메달에 가장 가까이 있어야 했다. 실제로 이번 대회 혼합복식 1번 시드는 한국의 이상수-양하은 조였다. 하지만 이상수-양하은 조는 8강전에서 다름 아닌 일본의 우승조에 패했다. 또 하나의 한국 혼복조였던 장우진-이시온 조 역시 일본의 타조에 켄타-마에다 미유 조에게 졌다.
 

▲ (뒤셀도르프=안성호 기자) 한국의 주전 복식조를 꺾고 결승에 올라 경기를 펼친 모리조노 마사타카-오시마 유야 조.

한국탁구가 늘 전략종목으로 꼽아왔던 남녀 개인복식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국의 에이스 복식조인 이상수-정영식 조가 4강에 올랐지만 더 밝은 색 메달을 놓고 싸웠던 준결승전에서 일본의 모리조노 마사타카-오시마 유야 조에 졌다. 일본은 또 하나의 복식조인 니와 코키-요시무라 마하루 조도 4강에 올라 한국과 동메달을 반분했다. 결승전에서는 중국의 판젠동-쉬신 조가 객관적으로 우승 가능성이 높지만 한국의 주전 조를 이기고 올라간 모리조노 마사타카-오시마 유야 조의 기세도 만만찮다. 일본은 전략적으로 이들을 복식에만 출전시켰을 정도로 두터운 선수층까지 과시했다.

여자복식도 일본은 10대의 어린 선수들인 하야타 히나와 이토 미마가 호흡을 맞춰 4강까지 전진했다. 준결승전에서 세계 1, 2위가 힘을 합친 중국의 딩닝-류스원 조를 만나는 이들의 자리에는 본래 한국 선수들이 있어야 했다. 특별한 기대를 모았던 한국의 수비듀오 김경아-서효원 조가 32강전에서 바로 이들에게 패했다. 한국의 또 한 조 양하은-이시온 조는 64강 첫 경기에서 미국 조에 지고 탈락했을 만큼 ‘전략종목’이라는 전통이 무색하게 이번 대회 여자복식에서 한국은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 (뒤셀도르프=안성호 기자) 히라노 미우는 세계 여자탁구의 새로운 ‘히어로’다. 48년 만에 자국에 세계선수권 단식 메달을 안겼다.

남녀 개인단식도 드러난 성적만을 놓고 보면 일본의 선전이 눈에 띈다. 여자단식은 중국 다섯 명과 중국계인 싱가포르의 펑티안웨이, 그리고 일본의 히라노 미우와 이시카와 카스미가 8강을 이뤘다. 이시카와가 8강에서, 히라노가 4강에서 개인단식 연속 제패를 노리는 딩닝(중국)에게 졌지만 비중국계로는 유일하게 중국에 마지막까지 도전했던 나라가 일본이다. 특히 히라노 미우는 지난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에 이어 이번 대회에서 1969년 이후 48년 만에 자국에 세계선수권 단식 메달을 안긴 ‘히어로’로 새 역사를 써가고 있다. 반면 한국 선수들은 전원이 32강 이하에서 탈락했다. 한국 선수 중 가장 높은 시드권자였던 양하은은 일본의 가토 미유에게 졌다.

남자단식에서는 17세인 히라노 미우보다 더 어린 하리모토 토모카즈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자국 에이스 미즈타니 준을 32강에서 꺾은 하리모토는 16강전에서 타이완의 랴오쳉팅마저 누르고 당당히 8강에 진입했다. 작년 주니어 세계챔피언이기도 한 하리모토는 아직 카데트 연령인 만 14세에 불과하다. 일본은 하리모토 외에도 니와 코키가 16강전에서 옵챠로프(독일)와의 대결을 앞두고 있다. 한국의 이상수(상무)도 눈부신 선전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화제성 측면에서 현재까지는 일본 탁구가 각 종목에서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치 과거의 한국탁구가 그랬던 것처럼!
 

▲ (뒤셀도르프=안성호 기자) 하리모토 토모카즈는 아직 만 14세에 불과한 소년이다. 단식 8강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승리 확정의 순간!

문제는 이 같은 일본의 선전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전문가들은 “일본은 오래 전부터 우수한 유망주들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지속해왔다.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유치한 이후부터는 더욱 체계적인 관리가 보태졌고, 그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이 유망주들을 집중 육성하는 탁구아카데미 NTC(내셔널 트레이닝 센터)에서의 훈련 외에도 일찍부터 수많은 국제대회에 어린 선수들을 출전시켜 경험을 쌓게 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게다가 일본은 올해 하반기부터는 자국 내 실업팀들이 참가하는 세미프로리그도 출범시킬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린 선수들의 선전을 바탕으로 부쩍 높아진 탁구에 대한 관심을 인기의 기폭제로 삼을 요량인 셈이다. 인기가 높아진다면 더 많은 우수 인재들이 출현하고, 더욱 두터운 인프라가 구축될 것이 자명하다. 일본 탁구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 (뒤셀도르프=안성호 기자) 일본의 선전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미 많은 주목을 받아온 이토 미마 역시 만 17세에 불과한 어린 선수다.

특기할 것은 현재 일본탁구의 강세가 과거 한국탁구의 전성기를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기점으로 유망주들을 집중 육성해 성공한 경험이 있다. 유남규, 현정화, 김택수 같은 ‘과거의 영웅’들이 바로 현재 일본의 NTC와 비슷한 기능을 했던 기흥훈련원에서의 특별 관리를 기반으로 성장해 결국 세계정상에 섰던 인물들이다. 이들이 거둬들인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은 ‘탁구최강전’을 당대 최고 스포츠 이벤트 중 하나로 오랫동안 개최하며 두터운 인프라를 구축했었다. 일본이 계획하고 있는 자국리그가 어떤 성과를 낼지 여부도 그래서 더 특별한 관심을 모으는 건지 모른다.

한국탁구의 전성기 동안 일본은 절치부심했었다. '일본의 탁구인들이 한국탁구를 따라잡지 못해 고민을 토로하곤 했다'는 일화는 전성기를 구가했던 한국의 탁구인들에게서 종종 회자되곤 한다. 그러나 이제 국제무대에서 한국과 일본의 위치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전세는 이미 몇 년 전부터 확연히 역전돼 있었지만 '과거의 추억'을 놓지 못했던 한국의 탁구인들은 ‘끈질기게’ 미련을 갖고 있었다. “일본만은 언제든지 이길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뒤셀도르프에서의 결과가 바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 (뒤셀도르프=안성호 기자) 이상수의 선전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더 많은 승리를 기원한다.

그런 면에서 현재 한국탁구 최후의 희망으로 남아있는 이상수의 선전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개인복식에서 동메달을 따내고, 개인단식에서도 8강까지 올라 웡춘팅(홍콩)과의 대결을 앞두고 있는 이상수는 자칫 완전히 몰락할 수도 있었던 한국탁구에 실낱같은 회생의 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이상수가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탁구는 다시 도약할 수 있다. 물론 드러난 한국탁구의 현실을 ‘이상수의 선전’으로 덮어버리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다. 이제는 한국탁구가 ‘절치부심’을 시작해야 한다.

이미 한국탁구에 혁혁하게 공헌한 이상수는 현재 남자단식 8강전을 준비하고 있다. 상대는 이면타법을 구사하는 웡춘팅이다. 16강전에서 한국팀 동료 정상은을 이긴 난적이다. 설욕전도 걸려있다. 이왕이면 이상수가 더 많은 승리로, 더 밝은 메달로, 더 강한 자신감을 가져오기를 바란다. 웡춘팅과의 8강전은 한국 시간으로 4일 저녁 일곱 시 15분에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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