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망주’ 넘어선 유망주! 다시 즐긴다!!

<피플&핑퐁>

안재현(대전 동산고등학교 3학년)
‘유망주’ 넘어선 유망주! 다시 즐긴다!!

남고부 랭킹 1위 안재현이 지난달 단양에서 치러진 국가상비군 선발전을 5위로 통과했다. 성적순 4위까지만 자력으로 선발을 확정한 대표팀에는 아쉽게 들지 못했지만 남녀 통틀어 주니어 최고 성적으로 존재감을 뽐냈다. 탁구인들은 오히려 “안재현의 상비군 입성이 기량에 비해 늦은 감이 있다”고까지 평가한다. 그만큼 안재현은 적어도 기량 면에 있어서는 이미 각별한 인정을 받아온 선수다. 선발전 직후 이 ‘특별한’ 유망주를 다시 만났다.
 

 

’성장‘을 증명하다
 
고등학교 3학년이다. 아직 어린 선수가 국가상비군 선발전에서 숱한 실업선배들을 꺾고 1군에 진입했다. 그것도 최종 성적 ‘TOP5’다(18승 6패). 그보다 앞선 선수는 장우진(미래에셋대우), 이상수(삼성생명), 정영식(미래에셋대우), 정상은(삼성생명) 등등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실업 최강자들뿐이다. 성적순 4위까지인 국가대표팀 진입은 아쉽게 실패했지만 자력 선발이나 다름없는 성과였다. 남녀 한 명을 추가로 뽑는 대한탁구협회 추천 선발 가능성도 누구보다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대전동산고 3학년 선수 안재현 얘기다. 청소년 선수가 이만한 성적을 냈으니 칭찬받아 마땅할 일이다. 그런데 그가 이번 선발전에서 일궈낸 성과에 각별한 놀라움을 표하는 이가 드물었다. 상비군 선발은 당연하고, 조금만 분발했더라면 자력으로 들 수 있었을 대표팀에 대한 아쉬움을 오히려 더 많이 논한다. 다름 아닌 그가 바로 ‘안재현’이라는 이유 때문인데, ‘안재현의 탁구’는 사실 국내 남자탁구계에 숨어있는 ‘화두’ 중 하나였다.
  안재현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현재 고등부 최강자다. 근 몇 년 동안 국내 주니어무대를 붙박이로 석권하다시피 했다. 올해 성인무대로 진출한 1년 선배 조승민(현 삼성생명), 중원고 ‘라이벌’ 황민하 등과 더불어 지난해 아시아와 세계 주니어선수권에서 중국을 연파한 선봉에 있던 주인공이다. 두 경기 모두 그가 마지막 주자로 나가 마침표를 찍었다. 탁구인들은 이미 평범한 ‘유망주’의 틀 안에 그를 가둬두지 않은지 오래다.
  안재현의 상비1군 진입은 3수 끝에 이뤄낸 성과이기도 하다. 이미 고1 때부터 최종선발전에 진출했었다. 지난해도 마찬가지였지만 번번이 마지막 관문이 문제였다. 올해 다시 2차전 9승 1패로 최종전에 올랐고, 세 번째 도전 만에 마침내 1군이 됐다. 최종전 탈락의 트라우마는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았고, 결과는 그대로 ‘성장’을 증명한 일에 다름 아니었다. 많은 탁구인들이 어쩌면 ‘홀가분하게’ 그에 대한 기대를 내색할 수 있게 됐다.
  “목표는 일단 1군이 되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초반 경기들이 잘 풀리면서 셋째 날 정도부터는 대표 선발권도 보이더라고요. 끝까지 해보자 했는데 마지막 날 힘이 좀 빠졌어요. 고등학교 소속으로 나온 마지막 선발전인데 대표팀에 자력으로 들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 틀에 얽매이지 않는 안재현의 ‘자유로운’ 탁구는 기대감과 우려를 동시에 받아왔다.

‘믿음’을 선물하다
  안재현은 국내 탁구계에서 흔치 않은 유형의 선수다. 테이블 가까이에서 빠른 박자로 점수를 쌓아가는 스타일도 아니고, 중진에서 줄기차게 ‘파워 드라이브’를 전개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조금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선제 이후에도 테이블에서 떨어져 랠리전을 펼치다가 상대의 허점이 보이면 전진으로든 중진에서든 날카롭게 파고드는 임기응변 능력을 바탕으로 경기를 풀어간다.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청소년무대 최정상권에서 내려오지 않았지만, 탁구인들이 그의 가치를 드러내놓고 평가하지 못해온 것도 ‘스타일’ 때문이었다.
  이제는 제법 많이 알려져 있는 얘기지만 ‘안재현 스타일’은 동네 탁구장에서 비롯됐다. 그는 탁구에 입문한 대전 봉산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연습을 마친 뒤에도 탁구장에서 동호인들과 내내 탁구를 ‘즐겼던’ 것으로 유명하다. 동호인들과의 랠리는 이기기 위한 승부가 아닌 ‘놀이’에 가까웠고, 어른들의 온갖 불규칙한 구질들을 받아넘기면서 자연스레 연결 위주의 스타일이 몸에 뱄다. 이제는 추억에 가까워졌지만 입문 시기 몸에 밴 ‘연결 본능’은 승리가 최고의 덕목인 엘리트 스포츠 세계에서도 ‘안재현 탁구’의 핵심, 또는 바탕이 됐다.
  문제는 그 같은 연결 본능이 때로는 강점이었지만 때로는 단점으로 비치기도 했다는 것이다. 국내 비슷한 또래 선수들과의 경기에서는 여간해서는 뚫리지 않는 디펜스와 번뜩이는 재치가 통할 수 있지만, 더 큰 무대 더 강한 상대들과의 경기에서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은 언제나 안재현을 따라다녔다. 그를 만나는 지도자들은 늘 테이블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할 것을, 더 파괴력 있는 선제공격을 주문했지만 그렇게 간단히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면 굳이 ‘본능’이라는 단어를 동원할 필요도 없었을 일이다.
  그러므로 국내 최강자들이 총출동한 상비군선발전에서 일궈낸 성과는 안재현에게 지금까지 어떤 것보다도 큰 가치를 부여해도 될 만한 ‘사건’이었다. 탁구인들은 앞으로 안재현에게 닥칠 수 있는, 아니 닥칠 것만 같은 한계를 그 스스로 미리 차단해주길 바랐던 건지 모른다. 국내 무대를 석권하고, 주니어 국제대회에서도 맹활약을 하면 할수록 그의 탁구가 더 큰 성인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길 바랐다. 요는 “이렇게 잘하는 선수가 ‘국내용’에 그쳐서 되겠는가!”였다. 그만큼 그의 재능은 낯설고 특별했으며, 최종전의 부진을 넘어선 지난달의 선발전에서 안재현은 비로소 모두가 바라왔던 ‘믿음’을 선물했다.
  “중진에서 볼이 잘 맞았어요. 불안한 게 별로 없었죠. 하지만 평소 중진으로 떨어져서 치는 것에 대한 지적을 많이 받습니다. 애초에 떨어질 여지를 만들지 말아야 하는데 전진에서의 파괴력이 문제일까요? 기대해주시는 만큼 더 잘하는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 안재현은 파괴력 있는 선제공격을 기술적인 당면과제로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선발전에서의 경기모습이다.

‘탁구’를 즐기다
  안재현은 사실 탁구 스타일을 떠나 자체로 낯선 유형의 선수다. 인터뷰 도중 롤-모델로 삼고 있는 선배가 있느냐고 묻자 웃기만 했다. 기술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스승이 누구냐는 질문에도 선뜻 답을 내지 않는다. 독불장군? 하지만 그가 무척이나 예의 바르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캐릭터’가 잘 잡히지 않는다.
  힌트는 안재현을 선수로 이끈 그의 큰아버지 안창인(중‧고탁구연맹 심판이사) 씨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재현이는 모방을 좋아하고 잘한다. 대회에 나갔다가 잘하는 선수의 남다른 기술을 보고 오면 언제부턴가 혼자 그걸 따라 연습하고 있더라. 될 때까지 연습하고 몸에 익으면 자기 기술이 되는 거다.”라고 했다. 또한 “재현이는 다른 아이들이 흔히 하는 컴퓨터나 핸드폰 게임 같은 것도 아예 안 한다. 그저 탁구영상이나 본다. 그걸 또 따라서 연습하고….”
  지난 선발전 때 안재현은 전에 자주 구사하지 않던 직선 푸시를 몇 차례 선보였다. 짧은 드라이브 랠리 중에 빠른 스윙으로 들이쳐 득달같이 점수를 뺏어내곤 했다. 마치 일본의 탁구스타 마츠다이라 켄타의 특기를 보는 것 같았는데, 실제로도 안재현은 켄타를 보고 연습했다고 고백했다. “잘 치는 선수들 보면 흉내를 내보곤 하는데 늘 잘되진 않아요. 실전에서는 불안해서 못써먹을 때가 더 많고, 스윙이 이상해져서 고생할 때도 있고요. 그냥 해보는 거죠.”
  결론은 그거다. 스승이 없는 게 아니라 모두를 스승으로 삼고 있다는 것. 잘 하는 선수의 기술을 보면 따라 해보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것. 기존의 정형에서 벗어나있는 스타일로 높은 기대감 속에서도 막연한 불안감을 내포해왔던 ‘안재현의 탁구’는 알고 보면 연습과정에서부터도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는 것. 안재현은 “기술적인 성취감을 느낄 때 중요한 경기에서 승리한 것만큼이나 기분이 좋아진다.”고도 했다.
  핸드폰을 들고서도 다른 아이들처럼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탁구영상을 들여다보는 안재현에게 탁구는 어쩌면 여전히 ‘놀이’다. 역시 어린 시절 ‘놀이’처럼 시작해 몸에 익은 습성 때문일지 모른다. 열심히 하는 사람도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즐기는 사람이 열심히 하면 그 파괴력은 어느 정도일까? 안재현은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싶다”며 웃었다.
 

▲ 든든한 후원사가 날개를 달아줄 준비를 하고 있다. 다시 즐기면서 성장할 것이다.

‘전환점’을 맞이하다
  그리고 안재현은 올해 탁구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탁구용품사 엑시옴과의 후원계약이다. 엑시옴은 현 미래에셋대우의 장우진이 최고 선수로 성장하는데 큰 힘을 제공했던 회사다. 고교 진학 전 독일 유학을 주선하고, 중국 등 해외에서의 장기 훈련을 지원하면서 다시없을 경험들을 축적시켰었다. 그를 바탕으로 장우진은 2013년 주니어 세계챔피언이 됐고, 현재 한국남자탁구 간판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상비군 선발전 최종 1위의 주인공도 그다. 바로 그 회사가 안재현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것이다.
  엑시옴의 후원은 사실 작년 중반부터 시작됐다. 안재현은 중국의 베이징과 사천 등지의 클럽으로 몇 차례 훈련을 다녀왔고, 중국프로리그 2부 시합도 경험했다. 중국에서의 짧은 경험만으로도 탁구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는 안재현이다. “한국과 훈련량 자체는 큰 차이가 없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잘하는 친구들이 많기 때문인지 집중도는 좀 다른 느낌입니다.” 길진 않았지만 중국에서의 경험 이후 조금 더 성장한 안재현은 이번 선발전에서 바라던 성과를 냈다. 엑시옴은 보다 전폭적인 지원을 계획 중이다.
  엑시옴에서 후원 선수 훈련 일정을 담당하는 한민규 차장은 “가능하면 자주 오래 중국으로 훈련을 보낼 계획이다. 유럽으로는 몇 차례 연결돼있는 투어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전제로 현지에 있는 캠프에 참여할 수 있도록 조율 중이다. 국내에서 경험하기 힘든 선진시스템을 기반으로 국제적인 선수로 성장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탁구인들은 이 독특한 선수를 단순히 ‘유망주’의 틀 안에 가둬두지 않은지 오래다. 자신만의 탁구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안재현은 애초부터 국내에서의 전형적인 성장과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선수였는지 모른다. 안재현은 ‘국가대표급’ 상비1군으로 출발한 2017년을 완벽한 자신의 해로 만들고자 한다. 그에게 ‘자신의 해’란 어떤 대회의 우승이 아니라 원하는 기술을 제대로 몸에 익히고 성취감에 자주 취하는 것을 뜻한다. “의미 없는 대회에 나가는 것보다 수준 높은 훈련을 더 자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보면 필요한 대회에서의 성적도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 든든한 후원사도 뒤를 받치고 있고, 안재현은 다시 탁구를 즐긴다. 글_한인수 | 사진 안성호 (월간탁구 2017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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