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쇼팽 VS 리스트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흔히 19세기를 피아니스트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서 다양한 소리를 구사할 수 있는 피아노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악기였다. 그 때문에 가장 많은 피아노곡이 작곡되고, 가장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탄생한 것도 이 시기였다. 특히 쇼팽과 리스트는 시대를 초월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들이다. 
 

▲ 쇼팽과 리스트


파리에 온 두 명의 외국인 
폴란드에서 태어난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은 6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피아노를 시작하자마자 신동으로 불렸던 그는 종종 귀족들 앞에서 연주를 하곤 했는데 당시 언론으로부터 “천재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만 태어나는 줄 알았는데 국내에서도 천재가 태어났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12살 무렵부터는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이론과 작곡을 배웠고 지부니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이후 쇼팽은 평생 그 누구에게도 피아노 교습을 받지 않고 작곡과 연주에 전념했다. 
그러나 20세 무렵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간 쇼팽은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한다. 폴란드에 우호적인 프랑스 파리에서조차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자 그는 자신의 연주 실력에 큰 의심을 품으며 피아노를 더 배워야 할지를 고심하게 된다. 그러나 파리에서 알게 된 프란츠 리스트(1811~1886)가 연주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그의 개성을 없애버릴지도 모른다며 만류한데다가 우연히 만난 폴란드인 후원자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조금씩 파리 사교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쇼팽보다 한 살 어렸던 리스트는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를 통해 처음 피아노를 배웠지만, 베토벤의 제자이자 피아노 교본으로 유명한 체르니야말로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피아노 스승이었다고 전해진다. 리스트는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귀족들의 후원으로 일찌감치 빈으로 이주하여 음악을 공부했고 11살 때 데뷔 콘서트를 성공시키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지만 16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히고 만다. 
돈벌이를 위해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해 피아노 교습, 연주, 작곡 등 음악 관련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가던 리스트는 어느 날 바이올리니스트인 파가니니의 연주회에 갔다가 큰 충격을 받는다. 비록 다루는 악기는 달랐지만 화려하고 기교가 넘치는 파가니니의 연주는 당시 21살이었던 그에게 음악에 대한 또 하나의 열정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덕분인지 이즈음의 리스트는 피아노 연습에 열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리스트 외에는 아무도 연주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난해한 곡을 작곡하기도 했고,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하는 등 본격적으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파리여! 쇼팽에 귀 기울여라!
이 시기쯤 만나 친분을 쌓기 시작한 쇼팽과 리스트는 힘없는 조국을 떠나 타국인 프랑스 파리에서 음악 생활을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피아니스트였다는 점도 같았지만, 그 외에는 같은 점이 전혀 없었다. 리스트는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에 큰 키와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하고 기교로 가득 찬 피아노 연주가 특기였다. 19세기 파리는 이런 연주에 열광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스트는 물 만난 물고기나 다름없었다. 연주를 마치면 자신의 장갑을 피아노 위에 벗어 놓고 나가곤 했던 리스트의 습관 때문에 연주회가 끝난 후엔 그 장갑을 독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여성들로 인해 소란이 벌어지곤 했고, 이동 중인 리스트의 마차 뒤편에는 마치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팬들처럼 수십 대의 마차가 뒤를 따를 정도로 리스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에 반해 쇼팽은 창백한 얼굴, 왜소한 체구에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고 연주 스타일조차 섬세하고 감성적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유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처음으로 쇼팽의 연주를 접한 사람들로부터 ‘쇼팽의 연주는 아마추어 같다’는 혹평을 들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리스트는 쇼팽의 연주가 ‘매우 시적이고 감정이 풍부하며 형식도 신선하다’고 느꼈다. 그 때문에 성공가두를 달리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파리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쇼팽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어느 날 리스트는 자신의 피아노 독주회에서 갑자기 불을 모두 끄고 연주를 시작했다. 관객들은 새로운 퍼포먼스라 생각하며 음악을 감상했고 어둠 속에서 조차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완벽한 연주를 선보이는 리스트에게 감탄을 쏟아냈다. 하지만 연주가 절정에 다다를 때쯤 한 여자가 나타나 촛불을 피아노 위에 올려놨을 때 관객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이 감탄하며 감상하고 있던 연주의 주인공은 리스트가 아니라 쇼팽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쇼팽은 파리에서 뛰어난 연주자로 인정받으며 급부상하게 된다. 파리가 아마추어 같다고 낙인찍어버리고 외면하던 쇼팽의 연주를 제대로 듣게 만들겠다는 리스트의 통 큰 배려가 제대로 통한 셈이었다. 
 

▲ 쇼팽은 평생 고국인 폴란드를 그리워했지만 파리 공동묘지인 페르 라쉐즈에 묻히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묻을 때 고향 친구들에게 받은 선물인 폴란드의 흙 한줌을 뿌려달라고 유언했다.


다른 성향이 만들어낸 갈등
쇼팽과 리스트가 활동했던 19세기 유럽은 낭만주의가 만연했고 이성이나 합리적인 것보다 감성적이고 비이성적인 것들의 가치를 더 높게 생각하던 시대였다. 특히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는 낭만이라는 이름 아래 자유를 넘어 방종한 분위기까지 넘쳐났다. 그런 파리는 사교적이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리스트에게 최고의 도시였다. 그는 파리에서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 다양한 사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수많은 여성과 사랑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조용한 성격의 쇼팽은 연주회에서 유쾌하게 행동하다가도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우울감에 젖어들었고, 파리를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는’ 쓸쓸한 도시라고까지 표현하며 평생 고국 폴란드를 그리워했다. 결국, 한때 한 집에서 하숙을 하고, 쇼팽이 자신의 곡을 리스트에게 헌정할 정도로 돈독했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성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잦은 갈등을 겪게 된다. 
 

▲ 리스트는 특유의 사교적인 성격으로 젊어서부터 여러 음악가들을 도와주려 애썼고 노년이 되어서는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내는데 힘썼는데 그의 제자는 500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사진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리스트(중앙)의 모습.


그럼에도 리스트는 언제나 쇼팽의 시적 감수성과 서정적인 표현력을 부러워했다. 쇼팽 역시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하는 리스트를 볼 때면 곡에 대한 애정이 새로워진다고 말하곤 했다. 쇼팽은 ‘작곡가로서의 리스트는 낙제’라든가, ‘리스트가 내 흉내를 낸다’는 등 악평을 하기도 했지만, 자신은 전혀 따라갈 수 없는 거침없고 화려한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그의 연주를 빼앗아오고 싶을 정도’라며 질투심을 표출하기도 했다. 
평생 폐결핵에 시달렸던 쇼팽은 결국 39살이 되던 해 병의 악화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당시의 평균 수명을 따지면 그리 짧은 인생은 아니었지만 75살까지 건강하게 살다 간 리스트와 비교하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셈이다. 쇼팽에게 일방적인 절교까지 당했던 리스트였지만 쇼팽이 죽은 후에는 그의 삶과 음악에 관한 책(Life of Chopin; 내 친구 쇼팽)을 집필할 정도로 크게 슬퍼했다. 혹자는 이 책이 쇼팽을 ‘낭만파’, ‘감성파’라는 한계에 가두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리스트에겐 그런 감성이야말로 자신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쇼팽의 재능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월간탁구 2016년 10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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