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단원 김홍도 VS 혜원 신윤복

가장 좋아하는 조선 시대의 화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김홍도와 신윤복을 제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양반의 문화였던 조선 시대 회화는 그 안에 철학과 사상을 담아 많은 교훈을 주기는 했지만 그만큼 평범한 서민들이 다가서기에는 어렵기만 했다. 김홍도와 신윤복은 화가로서도 매우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지만, 무엇보다 그림의 소재가 일반인도 어렵지 않게 다가설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였다는 데 큰 장점이 있었다. 
 

평범한 집안의 비범한 화가

김홍도는 1745년 평범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의 기록이 거의 없어 그가 어떻게 그림을 시작했는지 확실하게 전해지지는 않지만, 그의 외가 쪽이 대대로 화원을 지낸 집안인 것으로 미루어 외가를 통해 그림을 접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그의 스승으로 알려진 강세황의 기록에 의하면 ‘젖니를 갈 때’부터 그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당시 최고의 화가이자 시인이며 평론가였던 강세황의 눈에 김홍도는 ‘천부적인 소질’을 가진 데에다가 ‘옛사람과 비교해도 대항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화가였다. 그 때문에 강세황은 김홍도를 조선 시대 그림을 그리던 기관인 도화서의 화원으로 추천했고, 그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29세라는 이른 나이에 영조(어진)와 세손 정조(예진)의 초상화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김홍도의 재능에 관심을 두게 된 정조가 왕이 된 이후에 자신의 어진화사를 맡긴 것은 물론 전폭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 김홍도의 「무동」과 「서당」. 배경을 생략하고 강한 붓놀림으로 주제를 강조한다.

 

▲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김홍도를 단지 유명한 풍속화가로만 알면 곤란하다. 그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 유일무이한 화가로 손꼽힌다. 

 

그러나 김홍도가 21세기 대중에게 유명한 이유는 그가 어진화사를 그릴 정도로 뛰어난 화가였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풍속도를 남겼기 때문이다. 김홍도는 그동안 화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백성들의 삶을 화폭에 그대로 담아냈는데 타작, 대장간, 고기잡이, 빨래와 같은 일하는 모습부터 씨름, 윷놀이, 고두놀이 등의 오락을 즐기는 모습들까지 생동감 있고 박진감 넘치게 표현해냈다. 그렇다고 김홍도가 풍속화에서만 뛰어난 능력을 보인 것은 아니다. 그는 산수화, 인물화, 불화, 영모화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다재다능한 재능의 화가였다. 그가 이토록 넓은 예술 세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선천적으로 천재성을 타고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폭넓은 교유관계 덕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는 자신과 같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남인, 소북, 중서인 출신들의 문인들과도 다양한 교류를 나누었고 이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나눈 친분은 그를 예술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화원 집안의 이단아

▲ 신윤복의 「미인도」. 섬세한 붓놀림에 금방이라도 화폭에서 걸어나올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다.

김홍도가 한참 강세황의 집을 쫓아다니며 그림을 배우고 있을 무렵인 1758년, 대대로 화원을 지낸 중인 집안에 신윤복이 태어난다. 그 역시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아버지인 신한평이 도화서에서 어진을 그리거나 모사하는 것은 물론 각종 의궤의 그림을 담당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한 화가였기에 신윤복 또한 자연스럽게 붓을 잡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에 이어 신윤복 역시 도화서 화원이 되지만 그는 그곳에 그리 오래 몸담지 않았는데 일설에 의하면 남녀 간의 춘정을 그린 것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신윤복은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풍속화가지만 두 사람의 화풍은 큰 차이를 보인다. 먼저 김홍도는 강하고 빠른 붓놀림으로 대상 인물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면서도 주제와 인물을 강조하기 위해 배경은 과감하게 생략해버리는 일이 많다. 또한, 채색도 최대한 절제하면서 먹의 농담을 활용해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신윤복은 가늘고 유연한 선으로 섬세하게 인물을 그려내는 동시에 꼼꼼하게 배경을 묘사해냈다. 그리고 빨강, 파랑, 녹색, 노랑 등의 선명한 원색을 사용해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더했다. 

그러나 두 사람 풍속화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그림의 모델이다. 김홍도가 많은 풍속화를 남기고 있기는 하지만 화원이라는 공직에 몸담고 있었던 만큼 문제가 될 만한 소재의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그는 주로 익살스럽고 소탈한 서민들의 일상을 그렸고 이는 회회적 가치뿐 아니라 조선 시대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물로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실제로 조선 시대 도화서 화원들이 오늘날 기록 사진가와 같은 역할을 했으며 영조가 서민들의 삶을 알기 위해 그림을 그려올 것을 명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김홍도의 풍속화는 일종의 민생 보고서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신윤복의 「단오풍정」. 신윤복은 원색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그림에 화려함을 더했다.



신윤복의 그림 또한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다. 그러나 그의 풍속화는 주로 남녀 간의 애정, 기녀들의 생활, 그리고 양반들의 풍류 등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조선 시대 회화 역사에 전무후무할 정도의 에로틱한 춘화까지 그리고 있다. 특히 조선의 성과 향락, 유흥을 주제로 한 신윤복의 풍속화는 특유의 해학을 담음과 동시에 유학을 추구한다는 양반들의 이중성에 대한 풍자까지 잊지 않는다. 
 

▲ 신윤복의 「월하정인」. 남녀 간 애정사를 즐겨 그린 신윤복의 그림은 관람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그리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주된 활동 시기인 18세기 후반은 영조와 정조가 차례로 재위하면서 문화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한 시기다.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으로 세종의 재위 기간에 이은 조선의 두 번째 황금기라고까지 일컬어진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회화 분야에도 영향을 미쳐 진경산수화의 정선, 문인화의 대가 강세황, 남종화를 토착화한 심사정 등 뛰어난 화가들을 연이어 탄생시켰다. 그리고 김홍도와 신윤복 역시 이 시기의 정치, 경제, 사회, 철학의 발전을 토대로 태어난 문화 예술의 새로운 물결이었다. 이들은 다양한 풍속화를 통해 그동안 양반들만의 문화였던 회화를 일반 서민도 친숙하게 즐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조선의 르네상스는 더 이상 꽃을 피우지 못하고 막을 내리고 만다. 신분제 완화, 토지소유 균등, 농공상의 균형적 발달, 부와 권력의 편중 지양, 실력을 우선으로 한 인재 등용 등 다양한 방면의 개혁을 꾀했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려던 정조의 죽음 이후 조선은 세도정치의 시대로 흘러가며 문화 예술은 점점 쇠퇴해간다. 이는 당시 최고의 화원인 김홍도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전무하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제도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그림을 그린 신윤복과는 달리 도화서의 화원으로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받았던 화원임에도 그가 죽음을 맞이할 무렵엔 사람들에게 잊힌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조의 개혁은 미완이 되어버렸고, 이제 움트던 문화 예술의 부흥기 역시 그대로 끝나버렸다. 하지만 인간의 도덕적 덕목을 강조하던 유교사상에서 벗어나 인간주의를 표방했던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들은 세상의 변화를 꿈꾸던 또 하나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월간탁구 2016년 8월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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