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마이클 잭슨 VS 프린스

지난 4월 21일, 미국의 팝 스타 프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져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특유의 난해한 가사와 퍼포먼스로 한때 프린스의 음반은 보수적인 우리나라에서 정식 발매가 금지되었던 데다가, 괴짜로 불릴 만큼 자유로운 성향은 한국 팬을 확보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곤 했지만, 그는 팝의 황제로 불리는 마이클 잭슨의 유일한 대항마로 손꼽힐 만큼 위대한 아티스트였다. 


동갑내기 슈퍼스타

1958년생인 마이클 잭슨은 미국 나이로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그의 형제들로 결성된 밴드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 살 때부터는 밴드의 메인 보컬로 활동하게 된다. ‘잭슨 파이브’라는 이름의 이 밴드는 이후 지역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는데 ‘I want you back’, ‘ABC’, ‘I’ll be there’ 등의 곡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석권했을 뿐만 아니라 마이클의 솔로 곡인 ‘Got to be there’, ‘Ben’과 같은 곡들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1979년, 이 형제 밴드의 막내이자 메인 보컬이었던 마이클은 솔로 앨범인 ‘Off the wall’을 발표하면서 성인 뮤지션으로서 성공적인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후 발표한 ‘Thriller(1982)’ 앨범은 기네스북에 가장 많이 판매된 앨범으로 등재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 앨범에 실린 ‘Billie Jean’은 빌보드 차트에서 7주 동안이나 1위를 차지했다. 특히 ‘Thriller’ 앨범의 성공은 흑인 가수들을 차별해오던 미국 음악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백인들의 음악인 로큰롤을 주로 틀어주던 라디오와 MTV가 마이클의 음악과 비디오를 방영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흑인 가수들에게도 많은 기회를 가져다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1970년대 후반부터 장기간 불황이었던 음반 업계의 흐름까지 단숨에 바꿔놓을 정도였다. 
마이클과 같은 해 태어난 프린스는 재즈 뮤지션이었던 부모를 통해 일찍부터 음악을 접했지만 두 사람의 이혼으로 친척 집 신세를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그런 프린스에게 음악은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었고 어릴 때부터 독학으로 여러 악기를 공부한 덕분에 10대 시절에 이미 20개 이상의 악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리고 19살이 되던 해 발표한 첫 앨범 ‘For you’에서 작사, 작곡, 연주, 편곡, 프로듀싱까지 모두 혼자서 소화해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이후 1982년 발표한 ‘Little red corvette’의 큰 성공으로 인기스타의 반열에 올랐고, 1984년에 만든 자전적 영화 ‘Purple rain’의 동명 OST 앨범이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무려 24주간이나 1위를 기록하면서 큰 인기를 누리는 것은 물론 높은 음악성까지 인정받게 된다. 팝, 소울, 펑키, 일렉트로닉 등이 혼합된 프린스의 음악은 ‘마이애미폴리스 사운드’라는 장르로 구분되지만, 오직 프린스만 가능한 음악이라고 여겨질 만큼 독보적인 개성을 자랑한다. 뛰어난 작사, 작곡 실력에 개성 있는 음색,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악기 연주 실력까지 프린스의 능력의 한계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지만, 노골적인 성적 가사와 퍼포먼스는 대중성을 해치는 큰 요인이 되기도 했다.  
 

▲ 마이클 잭슨


언론, 음반사와의 갈등

1980년대는 미국 팝 시장이 호황을 누린 황금기였고 그 중심엔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가 있었다. 마이클이 ‘Thriller’에 이어 발표한 ‘Bad(1987)’ 앨범은 역사상 한 앨범에서 가장 많은 곡을 빌보드 싱글 1위에 올려놓는 기록을 세웠으며, 11개의 수록곡 중 9곡을 혼자 작사, 작곡하면서 아티스트로서의 입지까지 견고하게 다져나갔다. 그에게 ‘King of pop’ 즉 ‘팝의 황제’라는 호칭이 붙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지만 이와는 별개로 언론은 그에 대한 자극적인 뉴스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런 과열된 언론의 보도를 홍보 수단으로 생각했던 마이클은 점점 자극적이고 허황된 이야기들이 쏟아지자 의도적으로 언론과 담을 쌓게 되었다. 게다가 심각한 성형부작용과 연달아 터진 성추행 스캔들로 그의 명성은 큰 상처를 입었고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수면제와 진통제에 의존하게 된다.  

프린스에게 닥친 악재는 음반사와의 갈등이었다. 끊임없는 창작열로 앨범을 계속 발표하길 원하는 프린스와는 반대로 음반사는 희소성과 마케팅을 이유로 2년에 한 번만 앨범을 발표하길 원했다. 이에 프린스는 음반사와 수년 동안 법정 소송을 벌인 것은 물론 계약서에 올라가 있는 ‘프린스’라는 이름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렸다. 그리고는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성 기호를 조합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사람들은 그를 ‘러브 심볼’ 혹은 ‘프린스라고 알려졌던 아티스트’라는 괴상한 호칭으로 불러야만 했다. 1994년에 발표된 앨범 ‘Come’에는 ‘Prince 1959-1993’이라는 부제까지 붙이며 프린스라는 이름의 종말을 선언할 정도였다. 이후 프린스는 ‘뮤지션은 음반사에게 착취당하는 노예’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뺨에 ‘slave(노예)’라는 단어를 새기고 뮤직비디오나 공연장에 등장하기도 했다. 2000년이 되어서야 프린스는 음반사와 갈등을 끝내고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지만 길고 긴 분쟁으로 인해 왕성한 활동을 해야 할 전성기를 혼돈 속에 보내야만 했다. 
 

▲ 프린스


언론이 만든 라이벌 구도

마이클과 프린스는 같은 해,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같은 시기에 왕성하게 활동했고,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이 양분되던 시대에 흑백 모두를 아우르는 음악을 만들어냈다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뜻밖에도 두 사람의 접점은 찾아보기 힘들다. 라이벌이란 이름으로 미디어에 나란히 등장한 것 외에는 공식적으로 같은 무대에 선 일도 없고 음악적 교감을 가진 적도 없다. 한때 마이클이 프린스에게 함께 음악을 하자며 손을 내밀었던 적이 있기는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고, 1984년 당시 걸출한 미국 가수들이 총출동했던 노래인 ‘We are the world’에도 프린스는 합류하지 않았다. 사실 언제나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자는 메시지를 주고자 했던 ‘good boy’ 마이클 잭슨과 역사상 최초로 ‘Explicit Lyrics: Parental Advisory(노골적 가사: 부모의 지도 필요)’라는 경고 스티커를 앨범에 부착한 ‘bad boy’ 프린스가 한 자리에 있는 모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마이클은 ‘프린스의 음악을 좋아하고 존경한다’고 말했고 프린스 역시 ‘언론에 나온 이야기들은 다 거짓말이다. 난 그의 음악을 존중하고 언제나 자극받는다’며 서로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라이벌이 되길 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뛰어난 아티스트인 두 사람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길 원했던 것은 그저 언론과 대중들이었을 뿐이고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꾸준히 해나가길 바랬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른 죽음이 안타깝다. 두 사람 모두 대중에게 이미 선보인 것보다 앞으로 보여주고 들려줄 것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스타는 많지만 ‘팝의 황제’, ‘왕자’라는 수식어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앞으로 또 있을까. 그 두 사람이 모두 하늘나라로 갔으니 지구 상의 팝의 왕국은 이미 몰락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월간탁구 2016년 7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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