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메달 전통 끊긴 한국탁구 ‘리우의 교훈’

프로 종목? 올림픽 종목?

프로 종목과 올림픽 종목. 한국 체육계에 존재하는 모호한 구분법이다.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 프로리그가 운영되는 인기 종목들 외에 나머지 ‘비인기’ 종목들을 묶어서 ‘올림픽 종목’이라고 통칭하는 게 관례다. ‘아마추어’가 아니고 ‘올림픽’이다. 이미 프로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이 낯설지 않은 시대에 앞뒤가 맞지 않는 잣대지만, 사실이 그렇다.

장기간 리그를 통해 대중에 수시로 노출되는 프로 종목들과 마찬가지로 ‘올림픽 종목’ 들도 연중 꾸준히 운영된다. 2군 리그나 유소년클럽 등을 운영하며 두터운 인프라를 쌓아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아마추어 종목들도 선수들을 선발하고, 수시로 대회를 개최하며, 내내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한 과정이 있고서야 올림픽에 나갈 선수도 나오므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올림픽 종목’이라는 단어에는 생각보다 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심각한 엘리트주의가 깃들어있다. 오로지 국제무대 성적에 초점을 맞춰 몇몇 우수자원들을 집중 지원하고 육성하는데 대부분 힘을 쏟게 만든다.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메달을 못 따면 비난을 받고, 과정이 아무리 나빠도 메달을 따내면 찬사를 듣는 우리 체육계의 솔직한 현실이 그 말 속에 집약돼있다.

매년의 과정들을 쌓아가며 탄탄한 저변을 구축하고 그 위에서 발전을 추구하자는 ‘체계적인 모색’은 그러니 공염불로 그칠 때가 많다. 당장 성적을 내야 하는 국가대표팀에 모든 힘을 집중하는 사이 소홀했던 저변이 점점 얇아지고, 빈약해진 토대 위에서 배출되는 자원의 위력은 또한 점점 약해지는 악순환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첫 단식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누워버린 정영식. 하지만 한국의 기쁨은 이게 마지막이었다. 사진 국제탁구연맹.

한국탁구 ‘올림픽 노메달’ 시대

18일 새벽 브라질 리우센트로 파빌리온3에서 치러진 리우올림픽 탁구 남자단체 3-4위전에서 한국이 독일에 졌다. 첫 단식에 출전한 정영식(미래에셋대우·24, 세계12위)이 스테거 바스티안(세계24위)에게 역전승했으나, 이어진 세 매치를 연달아 패했다. 노장 주세혁(삼성생명·36, 세계14위)이 유럽 초고수들 디미트리 옵챠로프(세계5위, 2단식), 티모 볼(세계13위, 4단식)에게 당한 2패보다는, 승부처에서 반드시 잡아야 했던 복식을 내준 상처가 뼈아팠다. ‘키-플레이어’로 지목된 이상수(삼성생명·26, 세계16위)는 끝내 5단식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독일전 패배는 곧 한국탁구가 ‘올림픽 노메달 시대’에 들었음을 의미한다. 탁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직전 대회였던 2012년 런던올림픽까지 한국탁구는 매 대회마다 꾸준히 메달을 획득해내며 탁구강국의 위상을 지켜왔다. 세 개의 금메달과 세 개의 은메달, 열두 개의 동메달까지 도합 열여덟 개의 메달로, 적어도 겉으로는 중국 다음 가는 위치를 지켜왔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남녀단식과 단체전에 걸려있던 열두 개의 메달 중 단 하나도 우리 품으로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 반드시 이겨야 했던 복식에서의 패배가 뼈아팠다. 사진 국제탁구연맹.

앞서 적은 내용을 기준으로 하자면 탁구는 대표적인 ‘올림픽 종목’이다. 뛰어난 기량을 지닌 몇몇 스타들이 오랫동안 국제무대에서 성과를 내왔고, 그 성과들에 기대 한국 체육계에서 나름 비중 있는 위치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생각해볼 것이 있다. 해당 스타들이 나이와 체력 등을 이유로 하나둘 대표팀을 떠나면서 탁구는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번 올림픽은 주세혁을 빼고 남녀 전원이 첫 출전이었다. 새 시대를 향한 시험대에서 바닥을 쳤다. 노메달을 탓하자는 것이 아니다. 한국탁구가 어쩌면 예의 ‘올림픽 종목’의 함정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악순환’의 고리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번 올림픽에서도 소득은 있었다. 특히 남자부 정영식은 중국의 세계 최강자들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는 접전을 펼치며 많은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남자대표팀 이철승 코치도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는 다를 것”이라며 아쉬움을 위안으로 에둘러 표현했다.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지만 여자대표팀 역시 20대 초중반의 선수들이 소중한 경험을 한 대회가 됐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게 과연 ‘노메달’일까. 또 다시 4년 뒤의 올림픽일까.
 

▲ 남자단체전 시상식. 한국 선수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금메달 중국, 은메달 일본, 동메달 독일. 사진 국제탁구연맹.

메달보다 값진 교훈

동메달결정전에서 한국을 꺾은 독일은 자국에 활성화돼있는 프로리그에서 수많은 경험을 쌓은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다. 유럽은 각 나라 국내리그와 해당 리그들이 연합해 챔피언을 가리는 통합리그까지 다양한 프로리그가 시행 중이다. 중국 역시 ‘슈퍼리그’라고 칭해지는 세계 최강의 프로리그를 운영하면서 안 그래도 강한 선수들의 실력을 끝없이 배가 시킨다. 한국 탁구 역시 ‘프로 전환’에 대한 논의는 종종 있어왔지만 그때마다 “우선 올림픽에서 성적을 내고 스타를 만들어야 흥행할 수 있다”는 논리에 막혀 진전시키지 못했다. 올림픽에는 나가지도 못한 남자배구나 남녀농구가 프로리그를 운영하며 흥행하고 있다는 사실과 비교된다.

굳이 먼 얘기처럼 들리는 ‘프로’를 논할 때도 실은 아니다. 중국 탁구인구가 우리나라 전체 인구보다 많다는 식의 ‘딴 세상’ 얘기도 굳이 들먹일 까닭이 없다. 한국탁구의 빈약한 저변을 우선 살필 일이다. 한국탁구의 등록선수는 2016년 대한탁구협회 기준 1,600명을 겨우 넘는다. 초등부의 꿈나무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중·고등부 팀들도 도미노처럼 해체를 반복한다. 선수 수급부터 곤란을 겪는 현장의 지도자들은 최저수준에도 못 미치는 처우 속에서 시름하고 있다. 지금 중요한 게 과연 또 다시 ‘4년 뒤의 올림픽’뿐일까.
 

▲ 원했던 “행복한 마무리”까지는 이르지 못한 주세혁. 하지만 “후배들의 성장”을 예감했다. 사진 국제탁구연맹.

올림픽을 대비해서 오랫동안 훈련하고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뛰어준 선수들에게는 물론 박수를 보내야 마땅하다. 소중한 경험을 한 대표선수들은 다짐대로 “다음 올림픽에서는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며 충분히 그 가능성을 보여준 것도 사실이다. 이번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를 앞둔 주세혁이 “한국탁구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을 말한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족해서는 안 될 일이다. 열심히 뛴 선수들이 또 그렇게 오랫동안 한국탁구를 대표하게 될 동안 이제까지와 같은 과정을 반복해서는 밝은 미래는 없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또 다시 같은 문제로 고민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한국탁구가 메달 없이 마무리한 2016년 리우올림픽을 메달보다 값진 교훈을 얻은 대회로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계속해서 ‘올림픽 종목’ 또는 '효자종목'이라는 허명을 좇을 이유가 없다.
 

▲ 여자팀 마지막 경기였던 싱가포르전. 양하은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다시 내일을 준비하자. 사진 국제탁구연맹.

다행히 최근 한국탁구계에는 올림픽과 상관없이 좋은 징조가 있다. 올해 4월 한국수자원공사가 남자 실업탁구단을 창단했고, 오는 10월에는 ‘보람할렐루야 남자탁구단’도 창단을 앞두고 있다. 실업팀의 증가는 좁은 진로 때문에 고민하는 청소년 선수들에게 힘을 주고, 꿈나무들의 선수수급에서도 숨통을 틔워줄 수 있다. 프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세미프로리그'는 당장이라도 가능한 환경을 맞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중흥의 계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대표단에 모든 행정을 집중하는 머리뿐인 탁구가 아니라 뿌리부터 줄기까지 저변을 살찌울 수 있는 유연한 정책이 시급한 시점이다. 리우에서 메달 대신 가져올 교훈을 어떻게 활용할 지 탁구인들이 지혜를 모아야 한다.

몇 몇 스타에 지속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체계적이고 탄탄한 저변으로부터 키워진 많은 선수들이 치열한 내부경쟁을 뚫고 올라가 올림픽에서 맹활약할 수 있을 때, 한국탁구는 모호함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올림픽 종목’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월간탁구/더핑퐁=한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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