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의 동메달결정전 남긴 한국 남자탁구대표팀

주세혁의 소망

남자탁구대표팀 ‘맏형’ 주세혁(삼성생명·36)은 리우올림픽을 준비하는 동안 “미래를 책임지게 될 후배들과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수 있다면 정말로 행복한 마무리가 될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자신의 메달 욕심을 넘어, 조금은 지난한 과정을 밟아왔던 한국탁구의 ‘세대교체’가 이번 올림픽을 통해 확실히 완성되기를 소망하는 발언이었다.

세계 최고 수비수로 명성을 떨쳐온 주세혁은 우리 나이로 벌써 37세다. 전례대로라면 은퇴하고도 남았을 나이다. 그럼에도 그가 여전히 벤치가 아닌 코트에서 라켓을 잡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탁구의 불안한 현재와 관련이 있다. 4년 전 런던에서 유승민(삼성생명 코치), 오상은(미래에셋대우)과 더불어 남자단체 은메달을 따낸 직후 그도 은퇴를 고민했었다. 하지만 결국 코트를 떠나진 못했다. ‘베테랑 3인방’으로 불리던 간판들이 모두 대표팀을 나올 경우 한국 남자탁구의 국제무대 공백이 심각하게 우려된다는 탁구계의 만류 때문이었다.

실제로 한국탁구는 노장들의 뒤를 이을 차세대가 마땅치 않아 골머리를 앓아왔다. 여러 신진들을 시험했으나 기복이 심한 경기력으로 믿음을 심어주지 못했다. 세계선수권과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등 중요 이벤트마다 주세혁은 계속 에이스 역할을 수행했다. 고질적인 발 부상과 나이에 따른 체력고갈 등에 시달리며 올림픽을 준비해야 했던 주세혁의 속내가 편할 리 없었다. “행복한 마무리”는 완곡했지만 ‘후배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뜻도 담고 있었던 셈이다.
 

▲ ‘유종의 미’를 위해 뛰고 있는 주세혁. “행복한 마무리”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사진 국제탁구연맹.

정영식, 그리고 이상수

경기도 부천의 탁구명문 중원고 선후배 사이인 이상수(삼성생명·26)와 정영식(미래에셋대우·24)은 ‘불안한 차세대’의 대표적인 선수들이었다. 주니어 시절부터 ‘유망주’로 각광받았으나 선배들이 쌓아온 위상을 이어가기에 ‘2%’ 모자랐다. 꾸준하지 못한 경기력, 또는 부족한 결정력이 자주 발목을 잡았다. 13년 만에 단체 4강권에서 탈락한 2014 세계선수권대회, 안방인 인천에서 열렸지만 대표선발전도 통과 못한 같은 해 아시안게임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두 선수는 성실함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노력파다. 탁구밖에 모르는 ‘연습벌레’로도 유명한 둘은 아시안게임 출전 불발의 아픔도 훈련으로 극복했다. 지난해 초반부터 10월까지 지루하게 이어졌던 올림픽 출전경쟁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예의 ‘성실함’이 바탕이 됐다. 대표 선발이 확정되고 잠시 맥이 풀릴 법도 했지만 이들의 의지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대선배 주세혁과 함께 훈련을 시작한 이후 이들의 눈빛은 더욱 살아서 반짝였다.

올해 3월 초 치러진 쿠알라룸푸르 세계탁구선수권 단체전에서 ‘희망의 전조’가 보였다. 올림픽을 향한 꾸준한 단련이 성과로 나타났다. 이상수와 정영식은 주세혁과 함께 맹활약하며 2년 전 탈락했던 4강권에 한국탁구를 다시 올려놓았다. 4강전에서 중국을 만나 패했으나 홍콩, 러시아, 포르투갈 등 숱한 난적들을 돌려세웠다. 폐막 이후 주세혁은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젠 내가 없어도 되겠다”며 미소를 지었다. 리우올림픽은 그로부터 약 5개월 뒤 열렸다.
 

▲ 정영식과 이상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한국탁구를 책임져야 할 선수들이다. 소중한 자신감을 획득한 리우올림픽이다. 사진 국제탁구연맹.

리우올림픽

개인단식 16강전에서 정영식이 세계랭킹 1위 마롱과 대접전을 펼쳤다. 초반 두 게임을 먼저 선취하며 완승을 당연시하던 중국 벤치를 혼란에 빠뜨렸다. 백핸드 연결력 외에 두드러지는 무기가 없었던 정영식은 놀랍도록 향상된 포어핸드 결정력을 앞세워 마롱을 바쁘게 만들었다. ‘금메달리스트’다운 상대 기량에 막혀 끝내 역전을 허용하고 눈물을 흘렸으나, 그 눈물에는 올림픽을 대비해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가 그대로 배어있었다.

한국은 사실 대진 운부터 좋지 못했다. 특히 남자단식은 16강전부터 중국 최강자들을 만나야 했다. 게다가 이상수는 장지커를 보기도 전에 루마니아의 노장 크리산에게 패했다. 결국 노메달로 개인단식을 끝냈다. 하지만 보이는 성과가 없다고 소득이 없진 않았다. 노련한 상대 노림수에 막혔지만 이상수는 국제무대에서 통하는 공격력을 재확인했고, 정영식은 다시 투지를 불태울 충분한 근거와 자신감을 마련했다. 힘들었던 개인전은 단체전에서 부담스러운 상대였던 개최국 브라질과 유럽의 전통강호 스웨덴을 완파하는 배경이 되어줬다.

그리고 다시 중국! 첫 단식에서 정영식은 또 한 번 명승부를 펼쳤다. 이번에는 장지커였다. 백핸드의 세계 최고수를 앞에 두고도 백핸드에서 밀리지 않았다. 순간순간 비어있는 포어코스를 공략하며 장지커를 흔들었다. 아쉬운 역전패를 허용했지만 이전처럼 ‘온순한 탁구’를 구사하던 정영식이 아니었다. 정영식은 이상수와 함께 나선 복식에서도 잘 싸웠다. 지난해 세계선수권 남자복식을 제패한 ‘최강 조합’을 상대로 이상수의 속공과 정영식의 코스 공략이 자주 통했다. 이 날 가장 힘겨운 승부를 펼친 선수는 오히려 ‘에이스’ 주세혁이었다.

한국벤치를 지킨 이철승 코치는 경기 직후 “테이블 가까이에서도 빠르고 강한 드라이브가 가능한 중국탁구는 수비전형과 더욱 상극이다. 세혁(주)이의 패배를 탓하기보다는 선전한 영식(정)이와 상수(이)에게 박수를 쳐줘야 하는 시합이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좋은 마무리를 하겠다.”고 남은 경기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 유럽 최강자들이 뛰는 독일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왼쪽부터 디미트리 옵챠로프, 티모 볼, 스테거 바스티얀. 사진 국제탁구연맹.

해피엔딩은 가능할까?

선배 주세혁(세계14위)과 노력파 후배들 이상수(세계16위), 정영식(세계12위)이 힘을 합친 한국 남자탁구는 이제 동메달결정전만을 남기고 있다. 상대팀 독일은 쉬운 상대가 아니다. 디미트리 옵챠로프(세계5위), 티모 볼(세계13위), 바스티안 스테거(세계24위) 등 유럽을 수차례 제패한 강자들이 주전이다. 상대전적에서도 옵챠로프와 티모에게 우리 선수들 전원이 열세다. 정영식은 옵챠로프에게 5전 전패를 당했고, 에이스 주세혁 또한 상대 에이스들에게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나을 게 없다. 또 한 번 벅찬 승부다. 과연 한국탁구의 ‘리우 해피엔딩’은 가능할까?

많은 전문가들이 한국의 승리를 점치고 있다는 것은 일단 희망적이다. ‘달라진 한국탁구’가 그 근거가 되고 있다. 매서운 결정력 장착에 성공한 우리 선수들이 중국전에서 획득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강인하게 대응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논리다. 반드시 단식 한 번은 뛰어야 하는 상대 ‘3장’ 스테거 바스티안과 복식에서의 우위도 큰 힘이다. 더구나 독일은 승리가 예상되던 4강전에서 일본에 패하고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졌지만 상승세의 힘을 얻은 한국과 대조된다. 할 수 있다!

사실 ‘자신감’이나 ‘가능성’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다. ‘이길 수도 있는 경기’를 했다 해도 진 건 진 거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주세혁이 ‘메달’을 목표로 내건 것도 그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성취가 있고 없고에 따라 자신감의 무게도 달라지며, 가능성의 크기도 달라진다. 잘 싸운 남자대표팀이 리우에서의 선전을 ‘추억’으로 덮어두게 될지 ‘중흥’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을지의 여부가 17일 밤 열한 시(한국 시간) 시작되는 독일과의 마지막 승부에 달려있는 셈이다. 이번만큼은 ‘선전’이 아니라 ‘메달’을 목표로 싸워야 한다.

‘행복한 마무리’는 주세혁 개인의 소망을 넘어 ‘세대교체기’를 마무리하는 한국탁구계 전체의 희망이기도 하다. 예비멤버로, 또는 훈련파트너로 선배들과 여정을 함께 한 후배들 장우진(미래에셋대우·21), 박강현(삼성생명·20) 등이 시상대에 선 선배들을 바라보며 또 다른 각오를 다질 수 있을 때 리우에서의 한국탁구는 진정한 ‘해피엔딩’을 맞게 될 것이다.
 

▲ 한국탁구의 해피엔딩은 가능할까?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정영식이 메달을 목에 걸 수 있기를 바란다. 사진 국제탁구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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