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삼국사기 VS 삼국유사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삼국사기다. 항상 이와 함께 거론되는 삼국유사는 그보다 백 년 정도 늦게 만들어졌지만, 그 가치는 삼국사기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두 개의 역사서, 하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 김부식과 일연

국가가 편찬한 삼국사기(1145)
학창 시절 국사 공부를 할 때 ‘삼국사기는 김부식(1075~1151), 삼국유사는 일연(1206~1289)’이라고 중얼거리며 암기를 했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지은이로 김부식 한 사람만 논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1109~1146)의 명에 따라 8인의 참고(參考), 2인의 관구(管句) 등 11명의 편사관에 의해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을 거느리고 삼국사기를 편집한 책임자가 바로 김부식이었다. 이들은 고기, 삼한고기, 신라고사, 구삼국사, 고승전, 화랑세기, 계림잡전, 제왕연대력 등의 국내 문헌과 삼국지, 후한서, 진서, 위서,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고 재구성하여 삼국사기를 만들어 냈다. 그중에서도 김부식은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진삼국사기표’와 각 부분의 머리말, 논찬 등을 직접 쓰거나 사료의 취사선택 여부 결정, 역사 인물의 평가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중국 역사서의 형식을 따라 기(紀)·전(傳)·지(志)·표(表) 등으로 구성된 기전체로 쓰였는데 ‘기’는 역대 왕의 정치와 행적을 연대순으로 서술한 것이고 ‘전’은 각 시대를 풍미했던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지’는 각종 문물과 제도를 항목별로 정리해서 기록한 것으로 일종의 문화사나 제도사로서의 성격을 지니며 ‘표’는 각 시대의 흐름을 연표로 간략히 나타낸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런 형식에 맞추어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12권), 열전 10권, 지 9권, 연표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의 명령을 받아 공식적으로 편찬한 역사서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에는 유교를 숭배하던 국가적 입장이 잘 반영되어 있다. 김부식 자신도 유학자였기에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충과 효를 강조했고 이상하고 괴이한 이야기들은 일절 기록하지 않았다. 또한, 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중에 신라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신라를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건국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신라가 제일 먼저 건국되고 뒤이어 고구려,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개인 노력의 산물, 삼국유사(1281)

▲ 삼국유사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고려 왕조의 국사가 될 정도로 명망 있는 승려였다. 삼국유사를 포함해 집필한 책이 100권이 훌쩍 넘을 정도로 박식하고 학문이 뛰어난 인물인 것은 확실하지만, 개인의 기록이다 보니 국가에서 편찬한 삼국사기와 비교했을 때 문장력은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다. 그러나 유교적 견지에 입각한 삼국사기가 싣지 않고 소홀히 넘어간 것들에 대한 기록들이 많아 그 가치는 매우 높게 평가된다. 특히 삼국유사의 ‘유(遺)’라는 글씨 자체가 ‘남기다, 전하다’와 더불어 ‘잃다, 버리다, 잊다, 빠뜨리다’의 의미까지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일연이 삼국유사를 지은 이유는 더 명확해진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를 포함한 기존의 역사서가 빠뜨리고 다루지 않은, 그렇기에 세상에서 잊혀지고 있는 이야기들을 모아 쓴 책인 것이다. 

삼국유사는 5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5권이 왕력, 기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의 9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기원전 57년부터 936년까지의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연대기가 실린 ‘왕력편’과 단군 신화를 비롯한 여러 고대 국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기이편’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말을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이용해 표기한 이두로 쓴 향가 14수가 함께 기록되어 있어 문학적 사료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일연이 승려였던 만큼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아 승유억불 정책을 펴던 조선시대를 지나는 동안 학자들에게 외면 당해야만 했던 삼국유사는 20세기 들어서야 그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으며 활발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역사가 우리를 지킨다
우리는 ‘삼국사기는 사대적이고 삼국유사는 자주적이다’, ‘삼국사기는 귀족적이고 삼국유사는 서민적이다’, ‘삼국사기는 유교적이고 삼국유사는 불교적이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둘 다 삼국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방식이 다른 것은 물론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경우도 매우 드물기 때문에 비교가 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는 김부식과 일연이 전혀 다른 사상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역사서를 만들게 된 근본적인 배경 자체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가 만들어진 고려 중기, 국제적으로는 송나라가 몰락하면서 고려를 섬기던 금나라가 군신 관계를 요구해왔고, 국내적으로는 이자겸의 난과 도참설과 같은 신비주의적 세계관이 고려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인종과 김부식은 국가 중심적이고도 교훈적인 역사관을 만들면 국가와 왕조를 지키는 일에 일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삼국사기가 수백 년 후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며 후손들에게 힘이 되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우기고 있는 현실에서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 모두를 우리 역사(아국:我國)로 서술한 삼국사기가 없었더라면 고구려사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의 근거를 찾기는 힘들었을 터이니 말이다.

한편 일연이 삼국유사를 지은 고려 말기의 사정은 더욱 어려웠다. 원나라의 침입, 삼별초의 난, 무신정권의 득세로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특히 고려가 원나라의 속국이 되는 굴욕까지 겪게 된 시대적 배경은 약소국의 비애를 느끼게 했고 그 속에서 일연은 보다 자주적인 역사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가 외면했던 이야기들이 잔뜩 실려 있다. 특히 삼국유사는 단군 신화가 실린 최초의 자료라는 것만으로도 큰 가치를 지닌다. 이는 우리의 뿌리를 알려줌과 동시에 민족주의의 근거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이란, 누구나 알지만 읽어본 사람은 없는 책이라는 농담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역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지만 읽어본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권의 역사서가 우리에게 미친 막대한 영향력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국인으로의 자긍심,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신감은 이 두 책에서부터 싹튼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월간탁구 2016년 2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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