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쿠알라룸푸르 제53회 세계탁구선수권 돌아보기

2016 쿠알라룸푸르 제53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은 지난 6일 막을 내렸지만 아직도 여운이 남아있다. 8월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치러진 유일한 단체전이어서, 전초전 성격을 가졌던 이번 대회 결과가 유독 더 신경이 쓰이는 건지 모른다. 한국대표팀은 남자 3위, 여자 9위로 이번 대회를 끝냈다. 4강에 복귀한 남자팀이 기대감을 높였다면, 두 대회 연속 16강에서 탈락한 여자팀은 적지 않은 우려를 남겼다. 특히 여자대표팀이 독일과의 16강전에서 보여준 무기력한 모습은 드러난 성적 이상의 실망감을 팬들에게 안긴 일이다.
 

▲ 한국 여자대표팀은 두 대회 연속 16강전에서 탈락하며 우려를 자아냈다. (쿠알라룸푸르=안성호 기자)

그런 면에서 이번 대회의 수많은 경기들 중 유달리 기억되는 시합이 하나 있다. 바로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의 여자단체 본선1라운드(16강전)다.

C그룹 2위로 본선에 오른 네덜란드는 1, 2단식 주자 리지에와 리지아오가 상대 리우지아, 리치앙빙에게 연거푸 0대 3 완패를 당해 탈락 위기에 몰렸다. 남은 것은 브릿 에런드가 소피아 폴카노바와 만난 3단식뿐이었는데, 브릿 에런드 역시 첫 게임을 3-10까지 뒤지면서 기울어진 분위기를 뒤집기 힘들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네덜란드의 반전드라마가 시작됐다. 놀랍게도 브릿 에런드는 3-10으로 뒤지던 게임을 12-10으로 뒤집는 괴력을 발휘했고, 결국 3대 1(12-10, 11-6, 10-12, 11-7) 승리를 거두며 승부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 알토란같은 활약으로 팀에 큰 힘을 제공한 네덜란드의 ‘믿을 맨’ 에릿 브런드. (쿠알라룸푸르=안성호 기자)

네덜란드 3단식 주자로 고정되다시피 한 에릿 브런드는 팀의 ‘믿을 맨’이다. 역시 8강에 올랐던 2년 전 도쿄 세계선수권에서도 고비마다 끈질긴 승부로 큰 힘을 보태더니, 이번에도 ‘허리’를 담당하며 알토란같은 활약을 펼쳤다. 네덜란드는 예선 C그룹 수위결정전이었던 싱가포르전에서 풀-매치접전 끝에 2대 3의 석패를 당했는데, 비록 졌지만 브릿 에런드가 3단식에서 리 이사벨레 시윤을 이기면서 마지막까지 상대를 몰아붙일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평균 연령 37.5세의 이번 대회 최고령팀이지만 에릿 브런드는 22세의 '영건'이다. 가장 어린 선수가 놀라운 역전승으로 추격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서 팀의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브릿 에런드가 거짓말같이 3단식을 따내자 분위기는 네덜란드 쪽으로 급격히 넘어왔다. 막내의 선전에 자극받은 노장들이 마무리에 나섰다. 첫 경기에서 힘없이 패했던 리지아오와 리지에가 두 번째 경기에서는 나란히 승리를 보태며 결국 역전에 성공했다. 리지아오는 리우지아에게 3대 0(12-10, 11-7, 11-8) 완승을 거뒀고, 리지에는 피 말리는 접전 끝에 리치앙빙에게 3대 2(6-11, 11-5, 8-11, 11-6, 13-11)로 이겼다. 네덜란드의 기막힌 반전드라마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 전체 승부가 걸려 있었던 마지막 5단식 듀스접전을 극복해낸 수비수 리지에. (쿠알라룸푸르=안성호 기자)

그런데 매치스코어 2대 2에서 돌입한 마지막 5단식 경기 도중 벌어졌던 상황도 주목할 만했다. 엘레나 티미나 네덜란드 코치는 ITTF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3게임이 끝나고 리지아오가 나에게 리지에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리지아오가 중국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 ‘리더’란 어때야 한다는 걸 보여준 리지아오. 팀의 최고참으로 후배들을 이끌었다. (쿠알라룸푸르=안성호 기자)

리지에는 3게임까지 1대 2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대로라면 네덜란드는 승리할 수 없었다. 그때 리지아오가 대단히 성난 표정으로 리지에의 경기력에 대해 야단을 치는 모습이 연출됐던 것이다. 코치조차 알아듣지 못했으니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팀의 리더로서 리지에로 하여금 마지막까지 경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일침인 것만은 분명했다. 패할 것 같았던 리지에는 이후 다시 힘을 냈다. 4게임을 이겨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고, 전체 승부가 걸려있던 마지막 5게임의 치열한 듀스접전도 놀라운 집중력으로 극복해냈다. 네덜란드의 '역전 드라마'는 결국 막내부터 최고참까지 팀 전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승리를 향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 셈이다.

엘레나 티미나(네덜란드 코치)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힘들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0대 3으로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루 전 싱가포르를 상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마지막까지 가는 접전 끝에 지고 말았고, (8강에 직행할 수 있는) 큰 기회를 놓쳤다. 우리는 대진표 상으로 한 번 더 기회가 오길 바랐지만 그렇게 되질 않았다. 우리는 입상하기 위해 여기 왔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8강에서 중국을 만나는 대진에 걸리고 말았다. 리지아오가 경기장에 와서 나에게 추첨 결과를 말했을 때 대단히 실망했고, 리지아오는 걸음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탈진한 상태였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경기를 포기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포기는 하지 않았다.” (ITTF 인터뷰 내용 중)
 

▲ 코트에서도 리지아오는 43세의 나이가 무색하게 매 경기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였다. (쿠알라룸푸르=안성호 기자)

엘레나 티미나 코치의 인터뷰에 따르면 43세의 노장 리지아오는 오스트리아와의 경기를 앞두고 체력적으로 거의 탈진상태였다고 한다. 32세인 리지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전날 싱가포르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벌였던 대접전이 큰 원인이었다. 대진추첨까지 8강에서 중국을 만나게 된 불운이 겹치면서 분위기마저 가라앉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선수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또 한 번의 풀-매치접전을 이겨냈다. 8강전에서는 최강팀 중국에게 결국 패했지만, 이번 대회에서 그 어느 팀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막내 에릿 브런드는 승부처에서 결정적인 힘을 보탰고, 최고참 리지아오는 코트에서는 물론 벤치에서도 팀의 리더가 어때야 하는지를 직접 증명해보였다.
 

▲ 네덜란드는 결국 이겼다. 비슷한 상황에서 경기를 치른 한국과는 대조되는 승부였다. (쿠알라룸푸르=안성호 기자)

네덜란드의 16강전은, 똑같이 예선 마지막 경기를 패하고 본선1라운드에 돌입했던 한국대표팀이 전날 패배로 떨어진 사기를 끝내 극복 못하고 무너졌던 것과는 상반되는 승부였다. 한국에는 아쉽게도 리지아오와 같은 리더가 부재했다. 코트에서는 물론 벤치에서도 무기력한 모습으로 마지막까지 해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한국대표팀에게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경기력보다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먼저였는지 모른다. 앞선 경기에서 누가 이기고 누가 졌든 서로 격려하고 또 질책하며 분위기를 만들어갈 수 있어야 승리의 기회도 찾아온다. 아쉬웠던 세계대회는 막을 내렸고, 지금으로선 쿠알라룸푸르에서 들이킨 ‘쓴 약’을 8월 리우로 향하기 전까지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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