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지의 인물탐구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소년은 테이블 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려 관중의 호응을 유도했다. 패기만만한 탁구 신성의 세리머니에 세계 탁구 팬들이 뜨겁게 환호했다. 6년 만에 한국에 세계주니어선수권 우승소식을 전한 장우진(성수고)이다. ITTF와의 또박또박한 영어 인터뷰도 화제가 됐다. 전영지 기자가 그를 만나 ‘우승 뒤풀이’를 했다.

  “경고 받을까봐 사실 속으론 걱정했어요.”
  18세 탁구 챔피언 장우진(성수고)이 싱긋 웃는다. 테이블 위로 껑충 뛰어올라간 우승 세리머니는 짜릿하고도 아찔했다. 지난 8일 모로코 라바트에서 펼쳐진 세계주니어탁구선수권 남자단식에서 우승했다. 지난 2007년 미국 팔로알토 세계주니어대회에서 정상은(현 삼성생명)이 정상에 오른 지 6년만의 쾌거다. 내용적으로도 완벽한 우승이었다. 톱시드 일본 에이스 무라마츠 유토를 8강에서 물리쳤다. 정상에 이르기까지 리앙징쿤(16강), 공링쉬안(4강), 저우카이(결승)까지 3명의 중국 주니어 에이스들을 돌려세웠다. 숨 막히는 랠리의 끝, 중국의 저우카이를 돌려세우고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소년은 테이블 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려 관중의 호응을 유도했다. 패기만만한 탁구 신성의 세리머니에 세계 탁구 팬들이 뜨겁게 환호했다. 

▲ 부모님은 늘 관중석 맨 끝에서 까치발 들고 응원하는 최고의 후원자다. 아버지는 공항에서도 누구보다 먼저 아들을 반겼다.

강원도 소년, 폭풍성장기
  1995년생 강원도 소년 장우진은 원래 축구선수를 꿈꿨다. 4살 터울 형을 따라 우연히 탁구를 배우게 됐다. ‘왼손 에이스’ 박영숙과 같은 강원도 속초 청대초등학교 탁구부 출신이다. 훈련이 너무 힘들었다. 꼭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축구를 좋아하니까 선생님이 탁구 한 번 하면, 축구 한 번 시켜주고 그러셨죠. 빵도 주시고.” 그렇게 시작한 탁구가 이제는 평생의 꿈이 됐다. 속초에서 ‘안동찜닭’ 포장마차를 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열렬한 후원자다. 아버지는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관중석 맨 뒤에서 까치발을 들고 아들의 경기를 몰래 지켜보시곤 했다. 
  장우진은 대기만성형이다. 초등학교 때까지 소위 ‘에이스’는 아니었다. 4강권 주변을 꾸준히 맴돌았다. 6학년 때인 2007년 교보생명컵 남자단식에서 준우승을 한 것이 최고 성적이다. 그러나 복싱선수 출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운동신경과 근성만큼은 남달랐다. 지고는 못 사는 승부욕도 그랬다. 한번 지고 나면 분이 풀릴 때까지 화장실에 들어가 펑펑 울었다.
  남춘천중학교 진학 후 조성필 코치의 지도 아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중1 때인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 전국남녀학생종별대회, 중2 때인 2009년 전국남녀종별탁구선수권에서 연거푸 2위에 오르더니, 3학년이 되던 2010년 3월 전국남녀중고학생종별탁구대회 단식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맛봤다. 그해 11월 인도에서 열린 국제탁구연맹(ITTF) 카데트 챌린지에서 단-복식 2관왕에 올랐다. 장우진의 탁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개인복식에서는 아깝게 우승을 놓쳤다. 함께 뛴 파트너 박찬혁(동인천고)과 함께.

강원도 소년 독일 유학기
  성수고 진학을 앞둔 2010년 말, 탁구전문용품사 엑시옴(참피온)의 김영렬 사장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독일 분데스리가 옥센하우젠 클럽으로의 1년 유학을 권했다. 2018년까지 용품 후원계약과 함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또래들과 다른 길을 선택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고민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독일 갔다와서도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고, 내 탁구가 이상해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있고.” 그러나 장우진은 도전을 택했다. “만에 하나, 나중에 잘 안되더라도, 독일리그를 뛸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고, 다른 길도 열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2011년 1월 1일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두려움보다 설렘으로 떠난 유학생활의 시작은 고난이었다. “막상 가니까 말도 안 통하고, 진짜 힘들더라고요. 달랑 전자사전 하나 들고 갔는데.” 독일 옥센하우젠 클럽엔 일본, 포르투갈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또래 선수들이 있었다. ‘서바이벌’을 위해선 영어를 배워야 했다. 절박했다. 1주일에 2~3회 영어과외를 받았다. 5월부터 동료들과 서서히 말이 통하기 시작했다. 독일 생활이 재밌어졌다. 유학기간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울 만큼 현지생활에 적응했다. 다음 난관은 탁구였다. 독일 탁구클럽의 분위기는 자유분방했다. “처음엔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여유롭고 좋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스스로 훈련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익혀야 했다. 독일에서 장우진의 탁구는 변했다. 장점이었던 포어핸드가 약해진 대신, 취약했던 백핸드는 강해졌다. “유럽은 중진에서 치는 탁구인데 한국은 탁구대에 붙어서 치는 스타일이잖아요. 독일 가서 백핸드 기술을 터득했어요.” 유럽탁구에서 즐겨하는 롱플레이(랠리)와 지구전도 좋아졌다. 로빙, 하프발리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됐다.
  중국 전지훈련도 경험했다. ‘롤모델’ 마롱의 클럽에서 테이블 위 ‘쇼트플레이’를 집중연마했다. 세계 1위 마롱의 탁구를 직접 볼 기회는 없었지만, 축구는 함께 했다. “마롱도 축구를 잘해요. 마롱이 공격수로, 제가 상대팀 골키퍼로 뛰었는데, 팀 내 서열 때문인지 수비들이 일부러 슬슬 비켜주더라고요.” 승부욕 강한 ‘골키퍼’ 장우진은 당연히 진검승부를 했다. 마롱을 상대로 ‘폭풍 선방’을 펼쳤다. “마롱 골을 다 막으니까, 다들 좀 봐주라고, 오히려 저한테 막 뭐라고 하던데요. 하하.”

▲ 트로피, 금메달, 은메달! 장우진의 전성기는 이제부터다.
▲ 현재 소속팀 성수고의 김동혁 코치는 장우진에 대해 ‘위기에 강한 선수. 반 박자 빠른 공격, 폭풍적응력을 지닌 영리한 선수’라고 평가한다.

준비된 소년의 ‘짜릿’ 우승기
  2011년 말 귀국한 직후, 장우진의 탁구는 잠시 혼란기를 맞았다. 백핸드와 포어핸드, 쇼트플레이와 롱플레이를 모두 가졌지만, 장단점이 들쭉날쭉 뒤섞였다. 장우진의 필살기로 꼽혔던 반 박자 빠른 포어핸드 드라이브는 오히려 퇴보했다. 김동혁 성수고 코치가 제자 장우진을 붙들었다. 두 달간 지옥같은 동계훈련에 돌입했다. 하루에 3~4파트씩 훈련하고, 비디오를 분석하며 스파르타 훈련을 이어갔다. “심장과 다리근육이 터질 것처럼, 평생 가장 탁구를 열심히 한 2개월”이었다. 
  땀은 배신하지 않았다. 돌아온 장우진은 2012년 4월 남녀종별탁구선수권에서 보란 듯이 우승했다. 2013년, 홍천에서 펼쳐진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선 전승 우승으로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이상수(삼성생명) 김동현(에쓰오일) 등 실업 선배들을 줄줄이 돌려세웠다. ‘고교생 에이스’의 귀환에 탁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2차 선발전에서 아쉽게 태극마크를 놓쳤지만 ‘장우진’이라는 이름 세 글자는 또렷이 각인됐다.
  2013년 8월 장우진은 카타르 아시아주니어선수권에서 복식, 단체전 결승에 올랐다. 아쉽게도 두 종목 모두 금메달을 놓쳤다.
  12월 초 모로코 라바트에서 열린 세계주니어탁구선수권, 장우진은 또다시 단식, 복식 두 종목 결승에 진출했다. ‘절친’ 박찬혁(동인천고)과 함께 나선 복식 결승에서 또 고배를 마셨다.
중국 에이스 저우카이와 맞붙은 마지막 단식 결승, 장우진은 간절하고 비장했다. 게임스코어 2대1에서 맞붙은 4게임이 승부처였다. 장우진은 1-6으로 밀리던 스코어를 끈질기게 따라잡았다. 경험이 풍부한 고관희 코치(동인천고)의 벤치 조언이 통했다. 수차례 동점이 반복됐다. 랠리에서 밀리지 않았다. 피말리는 듀스 대접전 끝에 16-14로 4게임을 따냈다. 장우진이 주먹을 불끈 쥐며 뜨겁게 포효했다. 기가 눌린 저우카이는 5게임에서 4-11로 무너졌다. 장우진은 저우카이를 4대1(11-6 8-11 11-7 16-14 11-4)로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마롱(2004년 우승), 미즈타니 준(2005년 준우승), 니와 코키(2011년 우승) 판젠동(2012년 우승) 등 전도양양한 주니어 챔피언의 계보를 잇게 됐다. “김동혁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중국선수도 정말 잘 쳤다. 그런데 네가 ‘더’ 잘 쳤다고.”

▲ 장우진은 독일 유학 길을 열어준 엑시옴 김영렬 사장에 대해 특별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엑시옴은 향후에도 장우진을 전폭 지원할 뜻을 밝혔다. 인터뷰에 동석했던 엑시옴 국내영업부 이성광 과장.

 소년은 울지 않는다
  장우진은 영리하다. 결승전 4게임 직후 뜨거운 포효는 다분히 ‘계산된’ 것이었다. “윤길중 춘천시청 감독님께서 ‘화이팅은 쐐기를 박을 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거든요.” 3대 1의 게임스코어에서 스스로 쐐기를 박을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강력한 제스처로 상대를 압도했다.
우승 세리머니도 사실 준비된 것이었다. 독일 분데스리가 클럽에서 프로선수들이 관중과 호응하는 모습을 지켜봐왔다.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세리머니였어요. 근데 막상 하고 나니 경고를 받을까봐 걱정도 되더라고요”라며 웃었다.
  우승 직후 영어 인터뷰도 화제가 됐다. 열여덟 살의 한국선수가 통역 없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ITTF 공식 인터뷰에 응했다. ITTF 홈페이지는 ‘영어를 하는 한국선수’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일찍이 세계무대에서 이런 10대 선수는 없었다. 중국 에이스를 농락한 실력도, 패기 넘치는 세리머니도, 침착한 영어 인터뷰도 비범했다. ‘탁구선수 3.0’의 탄생이다.
  장우진은 독일 유학 경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또래보다 한 학년을 내려앉았다. 친구들은 올해 실업 1년차지만, 장우진은 ‘고3’이 된다. “한 학년 꿇는 것은 상관없었다. 탁구에 대한 마음이 컸지 학년에 대한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큰 세상을 보고 왔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학년은 다운그레이드됐지만, 탁구 인생은 업그레이드됐다. 탁구기술뿐 아니라 위기 대처 능력, 적응력, 임기응변, 영어능력, 자신감과 패기… 모든 것이 독일 조기유학의 선물이다.
  장우진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눈 밝은’ 후원사, 엑시옴도 우승 쾌거에 흐뭇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엑시옴 모델인 장우진이 한국 러버, 한국 라켓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선수도, 제품도, 기술도 완벽한 ‘메이드 인 코리아’다. 세계주니어탁구선수권 우승 후 장우진은 이렇게 말했다. “탁구는 ‘러버’가 아니라 ‘실력’이더라고요.”
  만리장성을 뛰어넘은 세계챔피언을 향해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고단한 장시간 비행 직후 찍힌 공항사진 밑에는 ‘나이를 의심하는’ 짓궂은 댓글들도 달렸다. 장우진이 속내를 털어놨다. “30대 같다는 말엔 좀 충격 받았어요.” 단언컨대 실제로 본 소년 장우진은 앳되다. 속은 열길 물속처럼 깊고 여물다. ‘이기는 습관’을 배운 소년은 이제 울지 않는다. 3년 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또다시 만리장성을 껑충 뛰어넘는 꿈을 꾼다.       

▲ 소년은 울지 않는다! 내내 환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한 장우진.

글 전영지(스포츠조선 기자) | 사진 안성호

(월간탁구 201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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