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VS 차

디저트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식사 후 입가심으로 커피나 차를 마시는 일이 일상화되어있다. 그래서일까. 인스턴트 혼합 커피와 티백은 어느 가정, 어느 사무실을 방문해도 꼭 갖추어 놓는 필수품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리고 "커피? 아니면 차?"라는 질문은 우리가 가장 일상적으로 듣는 질문이기도 하다.

 

각성을 위한 커피 VS 해독을 위한 차

인류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6세기경,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고원 지방에서 처음 커피 열매가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이 열매를 먹으면 신기하게도 기운이 나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이것을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할 때 사용하기 시작했다. 커피를 서구 문명의 상징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사실 커피는 이슬람 문화와 함께 발달한 음료다. 심지어 오스만제국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매일 적정량의 커피를 주지 않는 것이 이혼사유가 되기도 했다. 덕분에 커피는 기독교도들에게 이교도의 음료라고까지 불렸지만 이후 상인들과 부유층을 중심으로 유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면서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한편, 나무의 잎이나 열매, 또는 꽃을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는 것을 통틀어 차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해서 차는 차나무의 잎을 가공하여 만든 음료로 한정된다. 차나무는 중국의 서남부 지역이 원산지로서 약 5천 년 전 전설 속의 인물인 신농이 우연히 찻잎을 접한 뒤, 정신이 맑아지고 몸의 독이 해독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여러 가지 문헌들을 통해 중국에서는 적어도 3천 년 전부터 이미 차의 재배와 제조가 이루어진 것이 확인됐는데 중국이 차의 원산지인 증거는 ‘차’라는 명칭만 봐도 알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차는 차(cha), 또는 티(tea)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고 이는 중국의 차가 집산되던 광둥 성과 푸젠 성의 방언에서 비롯됐다. 육로를 통해 전파된 차는, 광둥 성의 방언(茶, cha)에서, 해로를 통해 전파된 차는 푸젠 성 방언(茶, ti)에서 유래된 호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커피 문화와 차 문화

유럽에 커피가 소개된 것은 1,600년쯤으로 이슬람 문화권과의 무역을 담당했던 베네치아 상인들을 통해서였다. 유럽인들은 커피의 쓴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우유를 섞어 마시기 시작했는데 특히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처음으로 커피에 설탕을 타 마신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베네치아에 커피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이 최초로 생겨나긴 했지만 진정한 카페 문화가 꽃을 피운 곳은 프랑스에서였다. 파리 최초의 카페는 소르본 대학 근처의 ‘르 프로코프’였는데 방문하는 손님들은 주로 문인, 예술가, 철학자들이었다. 볼테르, 루소, 디드로, 몽테스키외 등이 이 카페에 문이 닳도록 들락거렸고 그중에서도 하루에 커피를 열 잔씩이나 마시는 커피 애호가였던 나폴레옹은 커피값이 부족하면 카페에 모자를 맡기고 가곤 했다고 한다. ‘르 프로코프’가 큰 성공을 거두자 그 주변에 여러 카페가 덩달아 문을 열었는데 이런 카페들은 언제나 지식인들의 아지트가 되곤 했다. 그리고 당시 유럽 최대의 도시였던 파리에 확산된 카페 문화는 커피가 대중적인 음료로 자리 잡는 데 큰 몫을 했다.

우리는 보통 ‘차’라고 하면 녹차를 떠올리곤 하지만 사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차는 차소비량의 75%를 차지하고 있는 홍차다. 건조에 실패하여 발효된 찻잎을 처음으로 마시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녹차와는 다른 이 발효차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리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영국인들의 홍차 사랑은 유명하다. 영국인들은 매일 오후 4~6시 사이에 홍차와 함께 케이크나, 샌드위치, 스콘 등을 곁들여 마시는데 이를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라고 부른다. 현재도 하루에 약 1억 6천만 잔의 홍차를 소비한다는 영국의 차 사랑이 너무 지나친 탓이었을까? 영국은 차로 인해 중국과 갈등하다가 ‘아편전쟁’을 치르기도 했고, 미국 독립의 도화선이 되었던 ‘보스턴 차 사건’이라는 희대의 역사 현장 중심에 서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커피와 차

우리나라에 커피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경이다. 고종 황제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관에 피신해 있는 동안 커피를 접하게 된 것이 우리나라 커피 역사의 시작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조선 상인들이나 부유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 머물던 서양인들의 기록 속에 이미 수년 전부터 조선인들과 커피를 즐겼고 심지어 궁중에서도 커피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최초로 커피를 판매한 곳은 1902년, 현재의 중구 정동 이화여고 자리에 문을 연 손탁 호텔의 1층에 있었던 ‘정동구락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안타깝게도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반일 성향 외교관들이 자주 모이던 장소였던 만큼 커피를 판매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후 후타미, 카카듀, 깃사텐, 멕시코, 낙랑 등의 다방이 생겨나면서 본격적으로 커피 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다방은 주로 문화 인사들이나 애호가들이 관여하여 문을 열었는데, 특히 시인 이상은 네 차례나 다방을 개업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모두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비록 적은 양이었지만 주로 원두커피를 마셨던 우리나라는 이후 광복과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인스턴트 커피를 접하게 되고 대중적으로도 커피가 널리 소비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88올림픽을 앞두고 커피 수입 규제가 풀리면서 다시 원두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동시에 각종 커피 전문점들이 생겨나면서 지금과 같은 커피 전성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차를 마시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커피 못지않게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나 삼국시대 문헌에서 차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삼국시대부터는 이미 차를 마시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의 차 문화는 불교, 도교와 함께 발달하면서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 들어 불교 탄압으로 사찰이 쇠퇴하고 차 역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조정과 왕실에 있던 여러 가지 다례(茶禮)들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고 차 문화는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어 간 사찰을 통해 근근이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이후 조선의 3대 다인이라 불리는 초의선사,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를 통해 다시 차 문화가 일어나는 듯했지만, 일제 침략으로 인해 그 빛을 잃고 만다. 덕분에 차는 중국이나 일본만의 고유한 문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명절에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를 뜻하는 ‘차례(茶禮)’라는 단어만 봐도 전통적으로 차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커피와 차의 역사는 계속된다

최근 전통적으로 차를 즐겨 마셔오던 중국과 인도에 부는 커피 바람이 뜨겁다. 하지만 순수하게 커피 맛에 빠져들었다기보다는 커피와 함께 펼져진 문화의 신세계에 눈을 떴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특유의 씁쓸한 커피 본연의 맛을 즐기기보다 우유와 설탕 등의 부재료와 섞인 달콤한 커피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커피 전문점의 등장과 함께 젊은 층을 중심으로 커피와 카페 문화가 그 세를 넓히고 있다. 물론 차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건강 음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근에는 미국의 커피 소비량이 줄고 차의 소비량이 느는 추세다. 이는 차가 콜레스테롤을 줄이고 심혈관계 질병을 관리하는데 효과적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영어에는 커피 브레이크(coffee break), 티 브레이크(tea break)라는 말이 있다. 바쁜 일상과 업무 속에서 커피나 차를 마시며 가지는 짧은 휴식을 일컫는 말이다. 브레이크(break)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 그대로 커피와 차를 마시는 시간은 잠깐이나마 일상을 부수는 시간이 된다. 그 시간 속에서 인류는 인문학적 깨달음을 얻었고, 시대와 사상을 논했고, 자아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렇게 커피와 차는 앞으로도 우리 곁에서 때로는 활력소가, 때로는 든든한 휴식처가 되어줄 것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다.

 

글_서미순 (월간탁구 2014년 2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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