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한니발 VS 스키피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콜로세움 검투신이 시작되기 전에 얼굴에 하얀 분장을 한 사회자가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그는 과거,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를 찬양하며 이곳에서 적장 한니발과 싸운 스키피오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말한다. 고대사나 전쟁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니발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겠지만 스키피오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을 것이다. ‘명장 한니발을 막아낸 스키피오라는 사람이 있었다고?’하면서 말이다.

▲ 한니발과 스키피오


강대국 카르타고 VS 신생국 로마

카르타고는 BC 814년에 페니키아인(라틴어로는 포에니)이 세운 식민 도시로 시작된 국가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시칠리아 섬을 향해 툭 튀어나와 있는 반도 끝에 있던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 연안과 이베리아 반도 일부를 거느리고 해상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한 강대국이었다. 
카르타고와 비교하면 신생국가였던 로마는 시칠리아 섬의 서쪽을 영향권 안에 두고 있던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섬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의 발끝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서 최단거리로 3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시칠리아 섬 전체를 강대국 카르타고가 점령하게 된다면 로마로서는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로마와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을 사이에 두고 피할 수 없는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를 1차 포에니 전쟁(BC 264~241)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에서 해상 전투에 익숙지 않던 로마가 초반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머쥐면서 시칠리아 섬 전역을 속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사르데냐와 코르시카까지 손에 넣고 카르타고로부터는 거액의 배상금까지 받아내는 성과를 얻어냈다.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시민들은 커다란 자부심을 느꼈겠지만, 서지중해의 권력자였던 카르타고로서는 두고두고 설욕전을 다짐하게 만든 결과였다. 특히 카르타고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하밀카르 바르카는 무역을 가업으로 했던 가문의 본거지를 카르타고 본국에서 지금의 에스파냐로 옮기고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간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지만 끝내 패하고 말았던 그가 에스파냐로 가는 길에 동행한 사람 중에는 평생 로마를 적으로 삼을 것을 맹세하도록 한 아홉 살의 장남, 한니발 바르카가 있었다. 
 

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의 등장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2차 포에니 전쟁(BC218~202)은 20대 중반에 들어선 한니발이 로마의 동맹도시였던 사군토를 침략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았던 사군토 침략 사건은 로마를 자극하여 카르타고에 선전포고까지 하게 만든다. 한니발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했지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길을 택한다.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지금의 프랑스 남부를 돌아 로마로 향한 것이다. 알프스를 넘고 론 강을 건너 이탈리아 본토에 도착했을 때 그는 3만 명이 넘는 병사를 잃었고 남은 병사는 보병 2만과 기병 6천 명뿐이었지만 카르타고가 쳐들어온다면 해상을 통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로마의 허를 단단히 찌른 것이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 10 : 1 정도였던 로마 군에 비해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 3 : 1에 육박했다. 기병은 현대전으로 치면 화력을 담당하고 있는 병사나 다름없다. 한니발은 로마인으로서는 처음 보는 동물인 코끼리와 압도적인 수의 기병을 앞세운 동시에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전략과 전술을 펼치며 로마 군에 연전연승을 거두게 된다. 특히 BC 216년, 남이탈리아의 칸나이에서는 갈리아 용병까지 연합한 5만 명의 카르타고 군이 8만 명의 로마 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7만 명이나 되는 로마 군을 몰살시켜버렸다. 반면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이 잃은 병사의 수는 겨우 6천 명, 그중에서도 3분의 2는 갈리아 용병이었다. 그리고 로마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이 전투에서 목숨을 건져 도망친 약 1만 명의 로마군 중에서는 19살의 군사 호민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도 있었다. 

▲ 지중해 지도

 

로마의 구세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한니발이라는 이름은 이제 로마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한니발은 로마로 바로 진격하지 않고 로마와 연합한 국가나 부족들의 해체를 기대하며 이탈리아 전역을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로마 연합은 한니발의 예상처럼 쉽게 붕괴되지 않았다. 반면 에스파냐에서는 카르타고 세력의 확장과 함께 많은 부족 국가들이 로마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혼란스런 에스파냐에서 로마 군을 지휘하고 있던 스키피오의 아버지와 숙부가 목숨을 잃은 후에는 에스파냐 전선에 뛰어들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이제 막 24세가 된 청년 스키피오 말고는 말이다. 로마인들은 그의 가문을 덮친 비극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열렬한 격려의 박수를 보냈지만, 이 어린 청년이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뒤바꿔 버리게 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에스파냐로 건너간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이탈리아 본토를 쳐들어왔던 것처럼 한니발의 본거지이자 에스파냐의 수도인 난공불락의 요새 카르타헤나를 먼저 함락시킨다. 그리고 연이어 바이쿨라, 일리파에서의 승전보를 조국 로마에 전하기 시작한다. 4년 후 에스파냐에서 눈부신 전과를 가지고 로마에 돌아온 스키피오는 이제 자신을 북아프리카로 파견해달라고 요청했고 마침내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를 목전에서 위협하기에 이른다. 다급해진 카르타고는 아직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에게 본국으로 귀환할 것을 명령하게 되는데 이는 한니발이 이탈리아 땅을 밟은 지 16년 만의 일이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이제 전쟁의 결과를 결정지을 전투에 임하게 된다. 코끼리 80마리에 총 5만 명의 전력을 가진 한니발과 4만 명의 병력을 가진 스키피오는 자마에서 치열한 전투를 시작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2만 명이 넘는 카르타고의 병사들이 전사했고 포로가 된 병사도 2만 명이나 되었다. 반면 로마의 전사자는 1천 5백 명. 한니발은 자신의 병사들이 전멸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14년 전에 있었던 칸나이 전투의 완벽한 설욕전이었다. 그리고 자마 전투로 카르타고의 강화 제의를 받아낸 스키피오는 로마 시민으로부터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이는 ‘아프리카를 정복한 자’라는 뜻이다. 이후 카르타고는 서지중해의 강자라는 이름을 잃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수십 년 후 3차 포에니 전쟁(BC149~146)을 끝으로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 자마 전투(상상도)


영웅에게 등 돌린 조국

자마 전투 이후에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우연히 로도스 섬에서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세 명의 장수가 누구냐고 물었고 한니발은 첫 번째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두 번째로는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을, 세 번째로는 자기 자신을 꼽았다. 스키피오가 크게 웃으며 당신은 나에게 자마에서 패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한니발은 그 패배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첫 번째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자신감에 찬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공적인 업적만큼이나 도덕적 가치를 중시했다고 전해지는 스키피오라면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것 같다. 실로 한니발은 위대한 장수였고 그 위대한 장수와 겨룬 스키피오는 마치 충성스런 제자처럼 한니발의 전략과 전술을 답습하며 승리를 일궈냈기 때문이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처럼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세상이 전쟁으로 신음할 때는 그 누구보다 빛나는 영웅들이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매우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한니발은 패전의 책임만을 묻는 카르타고를 떠나 소아시아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 자신의 신병을 원하는 로마 군의 요구를 알게 되자 음독자살을 했고, 스키피오는 그의 성과를 질투하는 정적들의 음해에 진절머리를 내며 로마를 떠나 지방의 한 별장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렇게 화려한 영광을 뒤로하고 쓸쓸히 죽음의 길로 들어선 두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은 평생 목숨을 바쳐 싸운 조국의 동포들이 아닌 적장 스키피오, 적장 한니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월간탁구 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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