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 VS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같은 목적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언제나 우열을 가리게 되고, 세상 사람들에 의해 비교당하며, 이에 서로 자극받을 수밖에 없는 라이벌. 때로는 그런 라이벌이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기도 하고, 사람이 아닌 사건이나 현상의 형태를 가질 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라이벌이란 존재는 언제나 진보를 위한 필수 조건이 되어준다는 사실이다.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르네상스’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생각나는 인물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다 빈치(1452~1519)와 미켈란젤로(1475~1564)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그들은 전 인류사를 통틀어도 가장 성공한 예술가들이다. 그런 걸출한 두 인물이 동시대, 한 도시를 기반으로 예술 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두 명의 천재 예술가

사생아로 태어나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낸 다 빈치는 스승이자 당대 유명 화가였던 베로키오가 제자인 그의 그림을 보고 스스로 붓을 꺾게 했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뿐만 아니라 명석한 두뇌, 뛰어난 아이디어와 새로운 분야에 대한 깊은 관심까지 가졌던 그는 과학자, 건축가, 해부학자, 도시설계사, 식물학자, 엔지니어, 수학자, 지리학자, 군기술자, 철학자, 음악가이기도 했다. 비록 그런 다양한 것들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하나의 작품에 진득하게 몰입해 완성하는 것을 방해했고 덕분에 그의 작품이 대부분 미완성으로 남아있게 되었지만 세련되고 사교적인 성격을 지녔던 그는 언제 어디서나 환영받는 유명 인사였다.

한편 몰락한 귀족가문의 아들이던 미켈란젤로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화가라는 직업을 미천하게 여기던 부친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야만 했다. 그 자신조차도 핏줄에 대한 자부심에 몰락 가문이라는 콤플렉스가 뒤섞이며 평생 수도사 같은 절제된 삶을 살면서 고집 센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 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13살 때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에게 제자 수업을 받았지만 보다 ‘영웅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 조각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이듬해, 피렌체 제일의 권력가인 동시에 수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의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의 눈에 들어 본격적으로 조각을 공부하면서 예술가로 성장하게 된다.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유럽 전역에 걸쳐 큰 명성을 떨치고 있던 40대 후반의 다 빈치에게 이제 막 유명세를 얻으며 등장한 시작한 20대의 미켈란젤로는 재능은 있지만, 나이 어린 풋내기 정도로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이 다 빈치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미켈란젤로가 로마 바티칸 성당의 피에타상을 완성한 후였다. 피에타상은 공개되자마자 뛰어난 예술성을 가진 작품으로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고작 스물네 살의 젊은이가 아닌 유명한 중견 작가의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했는데 이에 억울함을 느낀 젊은 미켈란젤로가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피에타상의 마리아 어깨띠에 ‘피렌체사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다(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BAT)’라고 새겨넣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결국, 피에타상은 미켈란젤로가 사인한 유일한 작품으로 남기도 했다.

 

불화로 시작된 라이벌십

스물세 살의 나이 차, 전혀 다른 성장 배경과 성향,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조차 완전히 달랐던 두 사람이었지만 필연적으로 상대방을 직접 의식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피렌체 정부가 오래전에 사놓았지만 여러 조각가가 작업을 포기한 대형 대리석을 예술작품으로 완성해줄 사람을 찾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의뢰가 들어올 것이라고 믿고 여유롭게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던 다 빈치와는 달리 위원회를 찾아가 적극적인 작업 의지를 보인 미켈란젤로가 그 일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혼자 그 큰 대리석 덩어리를 갈고 닦아 최고의 조각품으로 탄생시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다비드상이다. 모든 이들을 감탄하게 했던 이 다비드상은 예술보다는 과학과 건축 등에 빠져 작품 활동을 쉬고 있던 다 빈치를 크게 자극했고 다시 예술혼을 불태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다시 붓을 들어 탄생시킨 그림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명화 모나리자였다.

재미있는 것은 다비드상이 완성되고 그 거대한 조각상을 놓을 자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서로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길에서 마주치면 서로 피하거나 모욕을 주는 일까지 일어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직접적인 대결의 기회가 찾아왔다. 피렌체 정부가 대회의장의 거대한 양쪽 벽면에 벽화를 그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벽면의 한 면은 다 빈치, 또 다른 면은 미켈란젤로가 작업하게 되었다. 벽화를 그리기로 결심했을 당시의 두 사람은 드디어 상대방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기회가 생겼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마주 보고 있는 벽에 비슷한 주제의 그림을 그리는 일은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앙기아리 전투를 그리기로 한 다 빈치로서는 어린 풋내기 화가와의 대결에서 혹시라도 기대에 미치치 못하는 작품을 만들어 낸다면 자존심을 구기는 결과만 낳게 될 것이 뻔했고, 카시나 전투를 그리기로 한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주력분야인 조각이 아닌 회화로 대결해야 한다는 사실이 큰 부담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끝맺지 못한 대결

젊은 시절부터 새로운 물감을 만들어 내는 일에 열성적이었던 다 빈치는 벽화의 밑그림을 구상하는 동시에 획기적인 물감 개발에 착수했다. 이미 밀라노에서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도 물감 개발에 실패했었지만 그는 자신이 완전히 새로운 물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작품에 몰입하기는 미켈란젤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카시나 전투의 장면을 훌륭하게 재현해내기 위해 수많은 스케치를 그리기 시작했다. 피에타상과 다비드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회화 쪽으로는 그럴듯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던 미켈란젤로에게 이번 일은 다 빈치와의 경쟁인 동시에 자칫 잘못하면 조각으로 쌓은 명성마저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관심과 당사자들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이 두 거장의 대결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상당 부분 벽화를 진척시킨 것으로 짐작되는 다 빈치는 물감 개발에 계속 실패하면서 이미 완성된 부분마저 상당히 손상되자 언제나처럼 작품을 완성하는 일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그는 새로운 의뢰가 들어오자 벽화 따위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다는 듯 손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미켈란젤로 역시 로마에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며 일거리를 맡겨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렌체를 떠나버렸다.

17세기에 루벤스가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다 빈치의 앙기아리 전투.
상갈로가 모사한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

그래도 완성되지 못한 두 점의 불후의 명작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카시나 전투는 벽화로 옮겨지지는 못했지만, 구상을 위해 미켈란젤로가 그린 부분 드로잉과 완성된 실제 크기의 초본을 보고 그의 제자가 그린 드로잉이 전해진다. 후에 그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릴 그림 ‘천지창조’처럼 모든 인물이 누드화로 그려져 있었으며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답게 등장 인물들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모습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실제로 벽에 옮겨져 그려졌다고 전해지는 다 빈치의 그림에 대한 기록은 더 구체적이다. 루벤스가 모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앙기아리 전투화는 세 마리 말과 기병들이 뒤엉킨 치열한 전투의 현장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미 작업에 착수했던 것으로 알려진 만큼 지금은 조르니오 바사리의 그림이 있는 대회의장의 벽면 뒷쪽에 아직도 그림의 흔적이 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낳고 있다. 실제로 벽 뒤쪽에 3cm 정도의 빈 공간이 발견되고 다 빈치가 사용하던 물감의 흔적까지 발견되면서 이 짐작은 점점 확신이 되어가고 있다.

두 사람이 남긴 흔적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상대방을 의식했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는 서로의 작품이나 인간성을 두고 공개적인 비난과 혹평을 주고받았지만, 상대방의 작품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점의 드로잉을 남기기도 했다. 때로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때로는 자존심을 자극하는 상대방의 작품은 분명 그들의 창작욕을 불태우게 했을 것이다. 화가는 다른 화가에게서 태어난다는 말처럼 어쩌면 이들에게 상대방은 자신을 더 위대한 예술가로 태어나게 하는 원천이 되어준 존재가 아니었을까.

 

글_서미순 (월간탁구 2014년 1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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