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남성 VS 여성

수백만 년 동안 진화를 거듭해온 인간이 인지하게 된 최초의 존재는 ‘이성(異性)’이 아니었을까 싶다. 남성과 여성, 이들은 무리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원으로 종족보존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며 살아왔기에 지금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백만 년을 함께 해도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그러기에 가장 많이 싸워온 대상 또한 바로 이성이란 존재가 아닐까?

 

남성과 여성의 역사

남성과 여성이라는 존재에 ‘맞수’라는 말을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남성과 여성은 불평등한 관계를 지속해왔고 단 한 번도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를 차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무렵, 선사시대의 인류가 여러 남성과 여성이 동시에 부부 관계를 맺었던 ‘군혼제’를 거쳐 여러 자식의 공통 조상인 어머니가 사회 중심이 되어 ‘모계제’가 되었고, 이를 통해 여성이 집안과 무리의 중심 권력을 가졌다는 학설이 등장해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많은 학자가 연구를 하고 원시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오지 부족들을 조사해 나갈수록 이 학설은 설득력을 잃어갔다. ‘모계제’ 사회의 모습은 발견될지언정 여성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모권제’ 사회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선사시대의 남성과 여성은 평등한 공동체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각자의 신체적 능력과 재능에 따라 일하고 분업하는 것을 당연시했으며 모두가 필요한 만큼씩 나누어 가졌다. 소유의 개념이 없으니 빈부의 격차가 있을 리 없고 남성과 여성 간에도 우위를 따지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독일의 사상가 잉겔스는 이 균형이 깨지고 남성 중심의 사회가 시작된 것은 농업의 발달과 함께 사유 재산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수렵과 채취가 경제 활동의 전부였던 시기,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을 원했던 인류가 직접 동물을 키우고 농사를 하면서부터는 필요한 것 이상의 생산물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 남아도는 생산물들은 보다 많은 노동력을 발휘한 남성의 소유물로 인정되곤 했다. 그 다음부터는 현대 사회에서도 익숙한 수순을 밟게 된다. 사유재산이 많은 자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재산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무력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무력의 필요성에 의해 강인한 신체를 가진 남성에게 더 많은 권력이 집중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불리한 신체적 조건을 가진 여성은 재산과 힘을 가진 남성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다

수 천 년 동안 인류는 남녀 사이의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서양의 사회상이 반영된 기독교의 기록에서는 여성은 남성의 갈비뼈에서 태어난 종속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반복해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동양의 여성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불교의 남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은 250개지만 여자 승려는 그 업이 더 크다 하여 348가지 계율을 지키라고 말한다. 특히 결혼한 여성을 내쫓을 핑계로 만들어진 칠거지악, 죽은 남편을 따라 죽음을 택하라고 말하는 열녀 사상, 여성이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결할 것을 권하는 유교는 남녀불평등을 가장 강조한 종교다. 민주적이었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아테네에서조차 여성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억압된 족속들이었다. 시민들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를 최초로 도입했지만, 여성은 노예, 외국인과 더불어 투표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주체적인 아테네의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7, 18세기에 유럽을 휩쓴 계몽주의는 ‘이성(理性)’을 진리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불합리를 타파하고 인간을 계몽하려는 사상이다. 유럽 근대 시민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된 계몽주의는 여성들에게도 남자들과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계몽주의자들에게조차 여성은 여전히 ‘미개한 상태’이며 아버지와 남편이 ‘교화’시켜야만 하는 존재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이 내건 가치인 ‘자유와 평등’이 남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에 반발하여 <여성권선언문>을 발표한 올랭프 드 구즈가 단두대에 올라 ‘여성이 사형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의정 단상 위에 오를 권리도 있다’고 한 말은 여전히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얼마나 낮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다.
19세기부터는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조직화되면서 사회 운동의 양상을 띠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1848년 뉴욕에서 열린 최초의 여성권리대회의 선봉장이었던 여성운동가들은 원래는 노예제도에 반대하던 인권운동가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1840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 노예제 반대 회의’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참가를 거부당하자 여권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의 투쟁은 크게 두 가지로 전개되었는데 첫째는 여성 노동자의 임금과 근로 조건 개선을 위한 경제 투쟁이었고 둘째는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달라는 정치 투쟁이었다. 

초기 여권 운동은 제한적인 성과를 낼 수밖에 없었지만 20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는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먼저 1893년 뉴질랜드에서 여성 참정권이 세계 최초로 인정됐고 잇달아 호주, 핀란드가 여성 참정권을 보장했다. 특히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여성들의 정치적 권리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는데 당시 러시아 정부가 여성들에게 남성들과 완전히 동등한 정치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1차 대전 기간 동안 참전한 남성들을 대신하여 여성들이 산업 노동의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 역시 여권 신장에 크게 기여한 요소로 손꼽힌다.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남성들이 일터를 지키고 있던 여성들을 다시 가정으로 보내기 위해 ‘모범적인 어머니’, ‘아름다운 주부’ 같은 이미지를 주입하기 시작했지만 남성에게 의존하는 삶은 이제 여성들에게 재미없는 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성와 여성, 동지인가 라이벌인가

이제 남성들은 오랫동안 자신에게 종속된 존재라고 생각해왔던 여성들의 커진 목소리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여성들의 몫이 되어버리는 것을 경험했고, 남성에게 순종하는 것을 미덕이라 생각하는 여성을 찾는 일 또한 힘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남성 자신들이 누려야 할 특권과 권리를 여성이 빼앗아가고 있다고 느끼면서 야기된 ‘여성혐오’의 분위기다. 남성들은 수천 년 간 자신들에게 의존하며 살아왔던 여성들이 당당히 경쟁자로 등장한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남성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권신장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 대상이 남성 자신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보다는 사회적 인식과 편견을 대상으로 투쟁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과 편견은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 자신에게도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힘겹기만 하다. 

여성의 역사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남성의 라이벌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여성의 입지는 여전히 좁고, 이제 막 여성의 손에 쥐어진 작은 권리에 대해서조차 공격당하는 일이 많지만 가까운 미래에 남성과 여성이 공동의 가치를 위해 함께 화합하고 투쟁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월간탁구 201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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