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월까지 한시적 운영, 우울한 연말

2년 새 두 팀이라니…!

데자뷔다. 재작년 이맘때 탁구계는 한 실업팀의 해체소식 때문에 무거운 연말을 보냈다. 이듬해 3월까지만 팀을 운영하겠다는 방침도 같고, 해체 배경에 거대 기업들의 이면이 작용하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 당시 해체된 농심의 선수들은 그나마 종합대회 이전까지 공식 통보가 없어 마지막까지 희망을 걸고 뛰었으나 끝내 사라지는 팀의 운명까지 막지는 못했었다.

그로부터 1년, 근근이 4강 체제를 유지해오던 남자실업탁구계에 또 충격적인 소식이 들렸다. 실업팀 에쓰오일이 전격 해체를 결정했다. 11월 23일 급작스럽게 통보가 내려왔다. 내년 3월까지만 팀을 운영하겠다는 요지다. 지난 2010년 창단해 남자실업무대에 활력을 불어넣어왔던 에쓰오일은 제대로 자리를 잡아보기도 전에 단 5년 만에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표면적 해체 이유는 모기업의 경영사정. 유남규 감독에 따르면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으며, 주요 인력을 해당 업무에 집중시키기 위함”이라는 내용의 해체 이유를 회사로부터 통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 3대 정유회사 중 하나로 꼽히는 에쓰오일이 특정 프로젝트 때문에 팀을 없앤다는 것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다. 그보다는 에쓰오일의 2대 주주였던 대한항공이 지분을 매각하면서, 조양호 대한탁구협회장(대한항공 회장)과 관계가 멀어진 것을 근본 원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에쓰오일 탁구단의 창단과 운영에 대한항공의 입김이 많이 작용해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얘기다. 하지만 지난해 2월 대한항공이 갖고 있던 에쓰오일의 지분을 매각했고, 이후 탁구단 입지가 불안하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소문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1년 전 해체된 농심탁구단 역시 해체 이전부터 좋지 않은 상황에 대한 소문이 나돌았으나 탁구계는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었다. 에쓰오일 역시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연달아 두 팀이 해체됐거나 해체의 과정을 밟고 있지만 탁구계의 무기력한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연말의 ‘데자뷔’는 그래서 더 안타깝다.
 

▲ 에쓰오일이 안타까운 해체통보를 받았다. 에쓰오일은 금년 대통령기와 전국체전에서 모두 준우승한 강팀이다. 유남규-양희석 코칭스태프. 월간탁구DB(ⓒ안성호).

에쓰오일만의 문제 아니다

에쓰오일에는 현재 다섯 명의 선수가 있다. 조언래, 이진권, 김동현, 이승준, 이태현이다. 모두 국가대표로 많은 활약을 했거나, 한국탁구 차세대 간판으로 주목받아온 선수들이다. 여기에 박신우(대전동산고)와 강지훈(중원고) 두 명의 유망주가 내년 입단을 예정하고 있었다. 김충용 초대감독(현 대한탁구협회 부회장)에 이어 지난해 7월부터 유남규, 양희석 코칭스태프가 선수들을 이끌어왔다. 곧 영주에서 치러질 실업연맹전과 연말 종합탁구선수권대회에 나설 예정인 선수들이 이런 상황 속에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선수들 분위기는 말할 수 없이 무겁죠. 남은 기간이라도 최선을 다하자고 독려하고 있지만 감독으로서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대학이나 다른 실업팀들이 입단 계약을 마무리한 상황에서 내년 입단을 예정하고 있었던 신인선수들의 앞길도 큰 문제예요. 탁구인들이 힘을 모아 대책을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에쓰오일 탁구단의 해체는 에쓰오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실업팀은 이제 삼성생명, KDB대우증권, KGC인삼공사 단 3개 팀만 남게 된다. 국군체육부대와 몇몇 시군청 팀들이 있지만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이벤트를 개최하기 힘든 구도다. 약해진 내부 경쟁으로는 국제무대에서의 경쟁력 향상도 기대하기 어렵다. 국제무대에서의 부진이 안 그래도 침체돼 있는 탁구인기의 하락을 부채질한다면 탁구선수를 꿈꾸는 유망주들도 갈수록 줄어들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자칫 ‘도미노’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당장 실업연맹은 올림픽이 열리는 내년 새로운 실업탁구리그를 출범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암초를 만났다.
 

 
▲ 국가대표로 많은 활약을 한 조언래(위)와 차세대 한국탁구 간판으로 주목받아온 김동현(아래). 당장 갈 곳을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월간탁구DB(ⓒ안성호).

모두의 지원과 협조, 어느 때보다도 절실

먼저 가시밭길을 걸어간 농심 탁구단은 해체 이후 새로운 팀 창단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끝내 열매를 맺지 못했다. 선수들은 새 팀 탄생을 기다리며 타 실업팀 더부살이를 감내했으나 결국 한 팀으로 다시 뭉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주전 한두 명은 새 둥지를 찾았으나 어쩔 수 없이 라켓을 놓은 경우도 있다. 해체를 통보 받은 에쓰오일의 선수들은 어떨까? 또 다른 기시감이 우려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탁구만 알고 지내왔던 선수들이 갈 곳이 없어지는 사태만은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유남규 감독은 “최선을 다해 새로운 팀 창단을 추진해보겠다”고 말했지만 창단이 그저 몇 사람만의 노력으로 쉽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한다. 일각에서는 창단을 주도했던 기업이 인수해서 제대로 운영해주지 않겠느냐는 바람을 피력하기도 하지만 희망사항을 섣불리 과대 해석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될 일이다.

종목의 비중도 문제다. 세계제패의 성과에 기대 많은 인기를 누렸던 과거와 국제무대에서의 한국탁구 위용이 많이 약해진 지금을 같은 시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냉철한 현실 인식 위에서의 단합으로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을 찾아야 한다. 팀의 유지가 회사에 미칠 수 있는 더 밝은 희망과 미래를 제시할 수 있다 해도 이렇게 쉽게 하나의 팀이 사라질 수 있을까. 근본적인 처방 없이 창단과 해체를 반복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머물러서는 한국탁구의 미래는 없다.

겨울이 오고 있다. 탁구계가 실업팀 해체라는 악재에 다시 당면했다. 또 한 번 시한부의 시간이 주어졌다. 탁구인들 모두의 자각, 지원과 협조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계절이다.
 

▲ 창단 당시의 밝은 각오는 5년 만에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김충용 현 대한탁구협회 부회장(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창단 감독이었다. 월간탁구DB(ⓒ안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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