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푸드, 슬로 시티 운동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 중에 하나가 '빨리빨리'라는 단어다. 무엇을 해도 서두르고 재촉하는 일에 익숙한 우리는 '빨리빨리'라는 말을 입에 단 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한국인 특유의 조급함은 때로는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전 세계에서 그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른 고도성장의 발판이 되었다는 평가도 받아왔다. ‘빨리빨리’라는 말은 성급한 한국인의 성질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유의 부지런함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급변하는 21세기 속에서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는 오히려 창의성과 적응력을 바탕으로 한 높은 경쟁력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가 여유로움이란 것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언제나 생산적인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식사 시간마저 15분을 채 넘기는 일이 드물 정도다. 하지만 효율성, 성과, 속도 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 채 살아온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세상이 정해준 가치를 좇기보다 진정 자신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빨리빨리’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놓쳐버린 것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슬로우 푸드와 슬로우 시티를 상징하는 마크

슬로 푸드-Slow Food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한겨울에도 여름 과일인 수박을 먹을 수 있고, 밤새 솥을 불에 올려 고아내곤 하던 사골국도 음식점이나 마트에서 손쉽게 구해 먹을 수 있다. 거리엔 주문만 하면 몇 분 만에 음식을 제공해주는 패스트푸드점 천지이고 ‘패스트푸드’라는 명칭이 붙지 않은 음식점들조차 음식을 식탁으로 내보내는 속도는 기대 이상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음식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매우 습관적이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끼니때가 되었으니 음식을 먹고, 허기가 느껴질 때는 일단 무엇이든 먹고 보는 식이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음식도 획일화되기 시작했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손꼽히던 장을 직접 담그는 집은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지역마다 집집마다 다른 요리법을 자랑하던 김치 역시 구입해먹기 시작하면서 어느 집이나 비슷비슷한 맛을 지니게 됐다. 이런 맛의 획일화에 반기를 들고 시작된 것이 바로 슬로 푸드 운동이다.

처음 슬로 푸드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서의 일이었다. 음식과 먹는 행위 자체에 특유의 자부심을 가진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의 심장부에 미국의 패스트푸드점이 생겨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각자의 취향은 무시된 채 똑같은 크기의 고기, 똑같은 종류의 소스, 똑같은 종류의 빵으로 만들어진 햄버거는 그들의 입맛을 획일화시키는 것은 물론 앞으로 자신들의 먹거리의 질까지 떨어뜨릴 것이라며 선언문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초기의 슬로 푸드 운동이 식탁의 즐거움을 보호하고 획일화된 음식 문화를 거부한다는 취지로 시작됐다면 현대의 슬로 푸드 운동은 농업과 농민, 문화, 전통, 환경, 등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지구 생물 다양성 보전에도 큰 힘을 쏟고 있는데 7,000여 종에 달하는 농산물 중에 현재 인류가 주로 먹고 있는 것은 30여 종으로 줄어들고 있는 만큼 지역 특산물, 향토음식, 전통 음식문화 보전의 필요성에 주목하고 있다.

슬로 푸드 운동은 무엇보다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식자재를 가지고 내 손으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슬로 푸드 운동의 확산은 농촌과 농민을 살리고 우리의 전통 음식문화와 환경까지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슬로 시티-Slow City 

슬로 푸드 운동의 연장 선상에서 나온 슬로 시티 운동 역시 그 시작은 이탈리아의 소도시 그레베 인 키안티(약칭 그레베)에서다. 인구 1만 4천여 명에 불과한 조그만 시골도시인 그레베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장을 역임하고 있던 파울로 사투르니니의 아이디어와 노력 덕분이었다. 인구와 소득감소, 젊은 층의 도시이탈로 인한 인구 고령화 등의 문제로 고심하던 파올로 사투르니니 시장은 다른 많은 지방 소도시들처럼 도시화와 발전의 길을 따르기보다 시골스럽고, 예스러운 전통을 가진 작은 도시로서의 개성을 더욱 강조하기로 했다.

특히 당시 화제가 되고 있던 슬로 푸드 운동에 참여하면서 이를 단지 먹거리에 한정하여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방식과 환경을 바꾸는 데에 접목하기로 했다. 이에 도시의 정책과 행정을 슬로 시티에 맞춰 진행하기 시작했는데, 토착 상점가를 살리기 위해 외부 자본의 대형 슈퍼마켓을 금지하고, 외부인의 부동산 소유를 제한하면서 각종 농축산물과 공예품의 생산도 옛 방식을 고수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패스트푸드, 대형쇼핑몰, 청량 음료수, 인스턴트 식품들을 도시에서 몰아내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즉각 반발했다. 당장 불편한 생활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올로 사투르니니 시장은 도시 정체성을 찾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자립하는 도시만이 경제개발의 혜택을 직접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에 대한 기다림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는 논리로 주민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나갔다. 결국 이 작은 도시는 슬로 시티라는 확실한 정체성을 갖게 되면서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소득원이라고는 올리브 농장과 포도원이 전부였던 이 도시는 이제 슬로 시티로의 변신을 꿈꾸는 전 세계 150여 도시의 롤모델이 된 것이다.

슬로 푸드와 슬로 시티를 지향해가는 그레베 인 키안티의 시장 모습.

 

슬로 푸드에서 슬로 시티로 이어지는 생활 방식에는 불편함과 수고스러움이 고스란히 따라오게 된다. 그러나 빠름과 느림, 도시와 농촌, 로컬과 글로벌 사이에서 조화로움을 찾을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1999년에 그레베에서 발표한 슬로 시티 선언문의 말미에는 ‘자비로운 계절의 변화가 주는 아름다움, 향토 음식의 맛과 영양, 의식의 자발성을 존경하고 여전히 느림을 알며 전통을 존경하는 고장’이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그 문장을 음미하다 보면 느리게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될 것이다.

 

글_서미순 (월간탁구 2013년 11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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