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마티스 VS 피카소

선명한 색과 장식적 모티브로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직시하여 그리는 앙리 마티스는 낮에만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린 화가다. 한편 선과 명암을 중시하며 상상력과 기억에 의존하여 그림을 그리는 파블로 피카소는 밤에 그림을 그리는 야행성 화가다. 평생 이런 습관을 고수했던 두 사람은 낮과 밤 만큼이나 다른 성향의 사람이었다. 
 

 

화가를 꿈꾼 두 사람
1869년, 프랑스 북부에서 태어난 마티스는 곡물상인 아버지와 취미로 그림을 그리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예술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변호사가 되기만을 꿈꾸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21세가 되던 해, 맹장염 수술로 몇 달 동안이나 침대 생활을 해야 했던 마티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어머니가 손에 쥐어준 물감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뒤늦게 미술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된 마티스는 본격적으로 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갔고 전통을 중시하는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와 여러 개인 화실에서 꾸준히 회화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27세가 되던 해, 국립미술협회가 주최한 살롱에 출품한 4점의 회화가 호평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티스는 부친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고 아내가 모자를 만들어 판 돈으로 생계를 꾸려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마티스보다 12년 늦게 태어난 피카소는 스페인 말라가 태생으로 미술교사인 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웠다. 그림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학교에서의 학습 능력은 저조했고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 수업에도 거의 출석하지 않을 정도로 흥미를 갖지 못했다. 
당시 예술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파리행을 꿈꿨는데 피카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그였지만 바르셀로나에서 같이 화실을 쓰던 친구 카사헤마스와 함께 파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 좋게 자신의 그림을 전시할 기회를 얻으며 일찌감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젊은 예술가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더 궁핍했다. 파리의 화려함 이면의 빈곤과 비참함은 피카소를 우울하게 했고 갑작스러운 카사헤마스의 자살로 큰 충격을 받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그는 가까이에 있는 파리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우울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화가를 후원하는 사람들
1905년, 진보적인 예술 전시회인 살롱 도톤에서 마티스의 그림 <모자를 쓴 여인>이 전시되었고 이를 본 한 평론가가 ‘야수’라는 표현을 쓰면서 화려한 색깔과 거친 붓 놀림에 충격을 표했다. 마티스는 <모자를 쓴 여인>이 대중과 보수적인 미술계의 반감만 사고 있었기 때문에 전시회 막판에 그 그림을 500프랑이라는 거금을 들여 사들이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온 리오 스타인과 그의 누이 거트루드 스타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마티스는 이들 스타인가(家) 사람들에게 그림을 팔기 시작하면서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그림에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마티스의 아내를 모델로 한 <모자를 쓴 여인>.


같은 해에 리오와 거트루드는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그것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피카소의 그림들이 이제 막 우울한 청색 톤의 그림에서 벗어나 연한 분홍색을 띠기 시작한 때였다. 사실 거트루드는 처음에는 피카소에게 별다른 흥미를 갖지 못했지만 학자 같은 딱딱한 느낌의 마티스에 비해 자유분방한 반항아의 이미지를 가진 피카소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다. 피카소 역시 자신처럼 프랑스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커트루드에게 호감을 느끼며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스타인가(家) 사람들이 마티스와 피카소의 그림에 관심을 두기 전까지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어온 피카소가 살롱 도톤에서 보았던 마티스의 문제작 <모자를 쓴 여인>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줬을 것이다. 아직은 무르익지 않은 피카소의 그림에 비해 마티스는 자신이 나갈 방향을 확실히 알고 있는 듯해 보였고 지난 수년간 신문에서 꾸준히 비평을 받아온 덕분에 유명하기까지 했다. 한편 마티스의 입장에서는 이제야 겨우 얻게 된 후원자를 12살이나 어린 신출내기 화가와 공유해야 했다. 스타인가(家)의 화실에 자신의 그림과 나란히 걸린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것도 썩 탐탁지 않았겠지만, 사교적이며 자석 같은 매력을 가지고 있던 피카소에 비해 마티스는 생각이 많고 다소 경직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종종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같은 시기에 같은 후원자를 얻게 되면서 서로를 민감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마침내 두 사람은 이듬해인 1906년, 거트루드가 개최한 한 모임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동안 상대방의 그림을 마주하면서 묘한 경쟁의식을 느껴온 두 사람이었지만 이후 서로의 화실을 오가거나 그림을 교환하면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였다. 
 

스타인가(家)의 화실에 <모자를 쓴 여인>과 나란히 걸려 있던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당시 피카소는 거트루드의 초상화를, 마티스는 <삶의 기쁨>을 그리는 중이었는데 그 해에 소개된 이 작품은 <모자를 쓴 여인>만큼이나 대중에게 충격을 줬다. 그것을 구매한 리오조차 그림을 사는 것을 망설이며 1주일이나 그림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는데 소진했을 정도다. 피카소로서는 리오가 쏟아내는 마티스에 대한 호평에 애가 탔지만 대담함과 화려한 색채로 수 놓인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그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피카소는 그동안 작업해왔던 거트루드의 초상화를 채 마무리하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여름을 보내기 위해 떠나갔다.

 
나만의 개성을 찾는 길
스페인에서 피카소는 마티스와 정반대의 길을 가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거의 색을 거부하면서 좀 더 간결하고 간소해진 느낌의 그림들을 그려댔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돌아온 피카소는 나름의 답이라도 찾은 듯 지금까지 그려온 거트루드의 초상화를 버리고 새로운 초상화를 완성해냈다. 단색조로 무겁게 그린 그 그림을 거트루드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아직 액자에도 넣지 않은 상태로 화실에 걸어두었다. 그것도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의 바로 위에 말이다. 화려한 색채의 <모자를 쓴 여인>과 단색조의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은 앞으로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하나의 징후처럼 보였다. 

마티스의 <삶의 기쁨>. <푸른 누드>는 이 그림의 중앙에 누워있는 검은 머리 여인에 근거하고 있다.


1907년, 마티스는 또 한 점의 문제작 <푸른 누드>를 발표한다. <푸른 누드>는 전통적인 누드에 대한 강한 반발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림 속의 여인은 반쯤 드러누운 자세지만 상체는 눈높이에서 정면을 보는 듯하고 하체는 극단적으로 비틀려서 엎드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피카소도 다섯 명의 여자가 등장하는 누드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마티스의 <삶의 기쁨>을 거칠게 해체한 듯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푸른 누드>에 대비되는 반 마티스적인 화풍을 띤 이 누드화는 비로소 피카소가 가야 할 길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이 그림이 바로 최초의 입체파 작품으로까지 평가받는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야 자신이 선배 마티스보다 더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피카소의 입체파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



지신을 이해하는 단 한 명의 라이벌
때때로 상대방의 작품이나 삶의 방식에 대해서까지 독설도 서슴지 않았던 마티스와 피카소였지만 서로가 없었다면 마티스의 야수파 그림들도,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들도 탄생하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상대방의 그림을 보며 그 능력에 질투와 경쟁심을 느끼기도 했고 순수한 경외심을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일에 서로가 커다란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피카소는 “모든 것들을 두루 생각해보니 오직 마티스밖에 없다”고 말했고 마티스는 “딱 한 사람만이 나를 평할 권리가 있으니, 그건 피카소다”라고 말했다. 그토록 다른 성격과 성향의 두 화가가 결국 상대방을 논하는 것에 있어서는 드물게 일치를 하고 있는 셈이다. 
참고 : 세기의 우정과 경쟁 : 마티스와 피카소<잭 플램 지음>

<월간탁구 2015년 8월호>

저작권자 © 더 핑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