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장제스 VS 마오쩌둥

정치체제와 사상이 다른 중국과 대만에서 공통으로 존경받는 쑨원(손문, 孫文)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를 주장한 사상가이며 혁명가였다. 그는 잇단 전쟁과 지도층의 부패로 몰락해가던 청나라를 버리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아우르는 새로운 ‘중화민국’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조국이 장제스와 마오쩌둥에 의해 둘로 나누어지는 일만 없었다면 그 꿈은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장제스와 마오쩌둥


소금 장수의 아들, 국가주석이 되다
장제스(장개석, 蔣介石)는 1887년, 중국 동부 해안 저장성의 작은 마을에서 소금 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9살이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자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지만 엄격하고 근면한 모친의 뜻에 따라 여러 스승에게 전통 한학을 배워나갔다. 17살이 되던 해부터는 신식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때부터 쑨원의 사상과 서구 문화를 접하면서 혁명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혁명을 위해 10대 소년 장제스가 택한 첫 번째 행동은 신식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변발을 자르고 일본으로 향한 것이었다. 장제스는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봉건 청 왕조에 반대하고 혁명을 꾀하는 비밀 결사인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여 다양한 인맥을 쌓아나갔고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까지 일본 제국군에서 복무한다. 이후 중국으로 돌아온 장제스는 국민당을 결성한 쑨원의 곁에서 경호업무를 수행하며 신뢰를 얻게 된다.

한편, 신해혁명의 실패 후 대 혼란을 맞은 중국 사람들은 이웃 러시아의 마르크스 레닌 사상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1년, 중국에서도 공산당이 결성되었지만, 러시아는 중국 공산당의 힘만으로는 중국 혁명을 끌어낼 수 없다고 보고 쑨원에게 관심을 두게 된다. 당시 서구의 지원과 원조를 얻는 데 실패한 쑨원에게도 러시아 측의 관심은 반가운 일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도움을 받는 한편 공산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을 허용했고 군사력을 키우기 위한 군사학교 설립에도 힘을 썼다. 쑨원의 곁에서 신임을 쌓아온 장제스는 그렇게 만들어진 황푸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에 임명되면서 국민당 내에서도 입지를 다져나갔다.

1925년, 지도자인 쑨원이 간암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국민당 내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쑨원이 살아있을 때부터 공산주의자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출신 부하들의 지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며 권력을 잡는다. 이후 장제스는 대규모 공산당 소탕작전과 군사작전을 벌여나갔고 1928년에는 베이징을 점령하는 한편 난징을 수도로 하는 국민 정부를 선포, 스스로 국민 정부의 주석이 되어 절대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공산주의자가 된 부르주아
1893년 중국 후난성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마오쩌둥(모택동, 毛澤東)은 유모와 하인을 둘 정도로 풍족한 환경에서 태어나 8살부터 서당에서 기초적인 유교경전을 익혔다. 이후 가난한 또래 친구들과는 달리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정규교육을 받기 시작했지만, 아들이 공부를 하기 보다 빨리 결혼을 해서 농장에서 일하기를 바랐던 부친의 뜻에 반해 집을 나와 학업을 계속해 나갔다. 특히 스승이자 훗날 장인이 되는 양창지의 추천으로 북경대학교의 도서관 사서로 일하게 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처음 접했을 뿐만 아니라 애덤 스미스, 찰스 다윈, 존 스튜어트 밀, 장-자크 루소의 책을 공부하며 사상적 기초를 닦아 나갔다. 

부친이 사망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재산을 물려받은 마오쩌둥은 교육 사업을 위해 학교를 만들고 교사 생활을 하는 등 안정된 생활을 이어나갔지만,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나갔고 1921년에는 본격적인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같은 해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에 참석하여 공산당 창립 멤버가 되지만 아직은 말단 당원의 자리에서 실무 및 이론 활동을 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또한 공산당이 국민당과 연합하고 있던 당시 흐름에 맞추어 그 역시도 공산당 당적을 가진 채 국민당에 가입했고 국민당의 지시에 따라 향촌 조사 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쑨원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제스가 공산당원을 학살하기 시작하면서 국민당에 가입되어 있던 공산당원들의 90%는 살해되고 말았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장제스의 표적이 되었던 마오쩌둥은 겨우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고 이후 패잔병을 규합한 ‘중국공농혁명군(홍군)’을 만들어 게릴라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국민당과 공산당, 쫓고 쫓기는 관계
제1차 국공합작(국민당과 공산당이 맺은 협력관계)의 결렬로 한때 동지였던 공산당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국민당은 그들을 맹렬하게 추격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마오쩌둥을 공산당 저항의 상징으로 보았고 “마오쩌둥과 그의 군대가 통일 중국의 유일한 걸림돌”, “스탈린의 꼭두각시”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전문 군사훈련을 받은 장제스에게 군대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책벌레 마오쩌둥의 홍군을 전멸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경험뿐만 아니라 그 규모에서도 마오쩌둥의 군사는 장제스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장제스에게 쫓겨 병력의 90%를 잃으며 고난의 행군을 하는 동안 엄격한 군율을 통해 군대를 통제함으로써 농민의 지지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을 대표하는 인물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6년, 마오쩌둥은 시안에서 장제스를 포로로 억류한 후, 장제스의 석방을 조건으로 한 제2차 국공합작을 맺으며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 1945년 일본 패망 후, 미국의 중재로 이루어진 회담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은 장제스(왼쪽)와 마오쩌둥(오른쪽).


한편, 이듬해 발발한 중일전쟁은 당장 중국에게 닥친 가장 큰 과제였다. 4년 후 연합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 때까지 중국은 일본이라는 만만치 않은 적군을 상대로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내야 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은 때로는 적군보다 상대방을 더 경계하며 일본 패망 이후를 대비했다. 그리고 1945년, 드디어 일본이 패망하고 일본 점령지에 대한 배분을 둘러싼 무력 충돌을 벌이게 되면서 장제스의 목숨을 담보로 맺었던 제2차 국공합작도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계속해서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초기에는 미국의 지원과 병력 수에 힘입은 국민당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지만 정부의 부패와 잔학성에 민심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반대로 민폐를 저지르는 군사에게 처형까지 불사하던 공산당의 엄격한 군율에는 환호했다. 더불어 소련의 지원으로 무장을 강화하게 된 공산당이 일제히 반격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통일 중국의 꿈을 이루려던 장제스는 1949년 바다 건너 타이완으로 철수하여 이후 다시는 중국 본토로 돌아오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쑨원의 유지를 받들어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려던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꿈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끝끝내 두 사람은 평생을 반목하며 서로를 멸시했고 수백만 명의 중국인들이 내전과 전쟁으로 죽어가는 순간에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그래서 혹자들은 말한다. 어쩌면 이들이 꿈꿨던 것은 통일 중국의 모습이 아니라 절대 권력자의 자리에 앉은 자신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월간탁구 201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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