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역명 제정에 얽힌 이야기

지난 3월에 연장 개통된 9호선 노선은 출퇴근 시간대에는 ‘지옥철’이라 불릴 정도로 승객들이 몰리는 구역이다. 그 때문에 혼잡도 증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김포공항에서 종합운동장까지 걸리는 시간이 30분 가까이 단축된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환호했다. 그러나 9호선 개통과 함께 지하철 역명을 두고 뜻밖의 찬반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봉은사’라는 역의 이름이 불교를 편향한다며 개신교 쪽에서 강한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주변 시설을 고려해 만든 역명

개신교의 주장처럼 삼성동에 자리한 사찰 이름을 차용해 만든 ‘봉은사’라는 역명은 얼핏 불교 편향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라는 이미지를 걷어내고 보면 ‘봉은사’라는 역명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봉은사는 신라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서 깊은 사찰이고, 과거에는 그 일대, 삼성동 땅의 대부분이 봉은사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지하철 역 이름을 결정할 때 그 주변의 건축물이나 공공시설, 문화유산 등의 이름을 빌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예를 들어 ‘서울대입구’, ‘이대’, ‘교대’, ‘한양대’ 등은 지하철역 주변 대학교의 이름을 차용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특히 이 네 학교는 최초로 지하철역에 대학교 이름을 붙인 곳이었는데 이로 인해 타 대학들이 새로 개통되는 지하철역에 자신들의 학교 이름을 붙이기 위한 경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홍대입구’의 경우는 ‘동교’이라는 이름이 확정되어 있었으나 개통 4일 전에 역명이 변경되는 일이 있었고, 몇 년 동안 사용해왔던 ‘삼선교’, ‘장충’, ‘갈월’ 등의 역 이름도 각각 ‘한성대입구’, ‘동대입구’, ‘숙대입구’ 등으로 바뀌는 일이 생겨났다. 지하철역에 대학교 이름이 붙으면 해당 학교의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일이었지만 7호선이 개통될 당시 총신대학교가 4호선 ‘이수’에 사용되던 부 명칭인 ‘총신대입구’를 새로 신설되는 7호선 ‘남성’에 붙이려는 것에 반발, 분쟁을 벌인 사건 이후로는 대학교의 이름을 딴 역명을 붙이는 것은 최대한 배제하고 있다. 
‘시청’, ‘올림픽공원’, ‘서울역’, ‘마포구청’ 등은 역 주변의 국가 주요 공공기관 또는 주요 공공시설의 명칭을 차용한 경우다. 공공시설의 경우는 먼 지역에서 온 사람들까지 자주 이용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지하철역에 그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매우 편리한 방식이다. 공공시설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주요 문화재나 고적, 사적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는데 ‘경복궁’, ‘선릉’, ‘남한산성입구’,‘낙성대’ 등이 이에 속한다. 


실제 지명을 사용한다

사실 지하철 역명을 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법정 및 행정구역의 명칭을 따르는 것이다. ‘방학’, ‘홍제’, ‘논현’, ‘목동’ 등과 같이 지하철역이 있는 주소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 된다. 일차적으로 떠오르는 지역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붙이는 방식이기 때문에 매우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는 지역의 크기가 방대할 경우에는 골치가 아파진다.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지역에 두 개 이상의 지하철역이 들어서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을지로입구’, ‘을지로3가’, ‘을지로4가’와 같이 숫자를 붙여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주변에 주요 공공시설조차 없을 경우에는 딱히 붙일만한 이름을 찾기 힘들어진다. 덕분에 뜻밖의 이름이 붙은 지하철역들도 있다. 예를 들어 ‘신촌’의 경우 행정구역상 ‘마포구 노고산동’ 소재로 실제 ‘서대문구 신촌동’까지는 도보로 15분이나 걸린다. ‘반포(잠원동)’, ‘왕십리(행당동)’, ‘복정(장지동)’ 등도 비슷한 경우다. 조금 다른 경우지만 역명으로 표기되기엔 거리가 먼 특정 시설의 이름을 차용한 경우도 많다. ‘태릉입구’에 내리면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을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화랑대’가 더 가깝고, 역명만 보고 온천에 가겠다고 길을 나서 ‘신길온천’에 내린다면 ‘우리 역 주변에는 온천시설이 없습니다’라는 안내판만 만나게 된다. 예정되어있던 온천 개발이 취소되면서 역 이름에 ‘온천’이라는 흔적만 남아버린 사례다. 역명 변경이 필요하지만, 온천개발 재추진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서울대입구’는 실제 서울대학교 정문까지는 1.8㎞나 떨어져 있으며, 특히 ‘남한산성입구’에서 남한산성에 가기 위해서는 택시를 타고 20분을 더 가야 한다. 그 때문에 지하철 역명에 ‘입구’라는 말이 붙으면 ‘실제와 멀리 떨어져 있음’이라는 뜻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지하철 역명으로 역사를 배운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을 하다 보면 전혀 생소한 이름의 역명을 만날 때도 있다. 익숙한 지명도 아니고 옛 사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단어들을 만날 때면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해진다. 그러한 것들은 지역 고유의 특색과 역사를 보전하기 위해 역사, 문화, 언어 등 각 분야의 문헌을 참조하고 고증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들이다. 
‘버티고개’는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의 이름인데 길이 좁고 지나는 사람이 많지 않아 도둑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 시대 치안을 담당하던 순라군들이 도둑을 쫓기 위해 “번도(도둑)!”라고 외치던 것이 변형되어 ‘번도→번티→버티’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풍수지리상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도망가는 모양새이므로 그를 막기 위해 서쪽에는 병시현(餠市峴)을 두어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애를 달래서 머무르게 하고, 남쪽에는 벌아령(伐兒嶺)을 두어 아이에게 벌을 주겠다고 하여 아이를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하는데 벌아령이라는 말이 변해 버티고개가 되었다고도 한다. 병시현은 떡으로 아기를 달래는 고개라 하여 ‘애오개’라고도 불리는 곳인데 ‘버티고개’와 마찬가지로 현재 지하철 역명으로 사용되는 이름이다. 옛 도성에서 아이가 죽으면 이 고개를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아총(兒塚)에 묻게 하였기 때문에 아이 시체가 넘는 고개라 하여 ‘애고개’라 불리다가 ‘애오개’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장승배기’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쉬면서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 모양을 한 남자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자 장승을 세워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으로 하여라” 하고 명하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장승이 만들어진 이후부터 이곳은 ‘장승배기’라는 지명을 얻었고 정조는 현륭원을 찾을 때마다 이곳에서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고 전해진다.   
이 밖에도 ‘뚝섬’, ‘굽은다리’, ‘노들’, ‘광나루’ 등의 역명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서울의 숨은 이야기들과 만날 수 있다. 

어감이 나빠서, 지역 이미지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 특정 종교를 편향하기 때문에 역명을 변경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합당하다고 느끼는 변경 사유에서 벗어나 일부 사람들의 이기심에서 기인한 역명 변경 신청은 자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더불어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역명이 만들어진 숨은 의미와 역사를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까 싶다. 

<월간탁구 201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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