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허영만 VS 이현세

최근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사용되는 만화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류, 저질, 하위문화의 상징으로 분류되던 영역이었다. 당시 만화를 창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무척 억울한 일임이 틀림없겠지만, 이제는 당당히 주류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특히나 그 변화의 현장을 목도하며 오랫동안 만화를 그려온 작가들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 허영만의 ‘각시탈’ 표지와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표지.


데뷔, 이강토와 설까치

해방 직후인 1947년에 태어난 허영만은 유복한 집안에서 생활하며 서양 화가를 꿈꾸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고교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생계를 위해 만화가의 길에 뛰어들었다. 이후, 여러 만화가 밑에서 문하생 생활을 거치고 비교적 늦은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신인 만화 공모전에 입선, 본격적인 만화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데뷔 후 3년 이내에 성공하지 못하면 만화를 접겠다는 결심을 했던 허영만은 다행스럽게도 같은 해 발표한 ‘각시탈(1974)’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를 얻게 되었다. ‘각시탈’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평소에는 바보 행세를 하는 주인공 이강토가 각시탈로 얼굴을 감추고 일본 압제자를 처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각시탈’은 큰 인기를 얻었음에도 갑작스럽게 연재를 중단해야 했다. ‘색시탈’이니, ‘무쇠탈’이니 하는 아류작들이 쏟아지면서 도서잡지윤리위원회가 출판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류작들 때문에 원작을 금지당하는 어이없는 사태였지만 심의 담당자의 한마디가 법인 시절이었으니 결국 ‘각시탈’ 연재는 중단되고 말았다.

▲ 이현세의 페르소나와 같은 캐릭터 ‘까치’.

한편, 허영만보다 7살 어린 이현세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만화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인식 때문에 미대 진학을 준비 중이었다. 그러나 대학 입시를 앞두고 색약이라는 판정을 받게 되자 자신의 원래의 꿈인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허영만과 마찬가지로 이현세에게도 문하생 생활은 필수였다. 하지만 그 시대의 만화계는 매우 열악했기 때문에 문하생이라는 이름으로 숙식만을 제공받으며 하루 20시간씩 남의 그림을 베끼는 일을 해야했다. 1978년, 드디어 꿈에 그리던 데뷔를 했지만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4년이나 지난 후부터였다. 순박한 청년 ‘까막이’가 만주에서 비적떼에게 가족을 잃고 복수하는 내용을 담은 ‘국경의 갈가마귀(1982)’가 큰 인기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고민 끝에 탄생시킨 자신만의 캐릭터인‘까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 ‘공포의 외인구단(1982)’이 말 그대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이현세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다. 

 

인기 캐릭터 VS 디테일한 스토리

▲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였지만 ‘공포’라는 단어가 심의에 걸려 감독 이름을 딴 ‘이창호의 외인구단’으로 개봉되었다. 

당시 만화계에서는 작가의 페르소나와 같은 주인공을 작품마다 등장시키는 것이 인기였다. 이상무의 독고탁, 허영만의 이강토, 이현세의 설까치는 그 시대를 향유했던 대표적인 캐릭터였다. 특히 이현세의 까치 캐릭터는 아직까지도 한국 만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순정적 사랑, 사회적 정의감, 불굴의 의지력에 마초적인 남성성까지 지닌 까치라는 인물은 1980년대 시대상에 부합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까치가 등장한 ‘공포의 외인구단’의 인기에 힘입어 당시 2천 개에 불과하던 전국의 만화 대본소 수가 무려 10배 이상 늘어났고, 대본소 만화가 처음으로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서점에서 판매되기까지 했다. 이현세 자신도 믿기 힘든 성공이었다. 그리고 연이어 발표한 ‘지옥의 링(1983)’, ‘떠돌이 까치(1984)’, ‘고교외인부대(1985)’ 등의 작품도 인기를 얻으며 까치는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캐릭터로 부상했다.


 

▲ 허영만의 식객은 꼼꼼한 취재를 통한 치밀한 전개로 많은 사랑을 받고있다. 

허영만은 이현세보다 데뷔도 먼저였고, 인지도도 먼저 얻었지만, 까치의 인기를 등에 업은 이현세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허영만은 일찌감치 이강토라는 캐릭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좀 더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특히 이현세가 까치를 통해 남성 위주의 영웅주의, 판타지, 신화적인 이야기로 인기를 얻은 데 반해 허영만은 좀 더 섬세하고 구체적인 소재를 선보이며 현실적이면서도 폭넓은 인물들의 모습을 그려나갔다. 그리고 ‘아스팔트의 사나이(1991)’, ‘미스터Q(1993)’, ‘비트(1994)’ 등의 작품을 통해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이런 허영만의 방식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어느새 사람들은 비현실적인 영웅담에 열광하기보다는 우리 가까이에 있을 법한 인물들의 친숙한 이야기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선이 굵은 남성적인 작품을 주로 그려온 이현세는 자신 역시 매우 마초적인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런 만큼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그랬기 때문에 많은 실패를 겪기도 했다. 먼저 극장용 애니메이션 ‘아마게돈(1988, 애니메이션은 1995)’의 제작 프로젝트가 졸속으로 끝나면서 이현세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한국 상고사를 복원하겠다며 도전했던 대작 만화 ‘천국의 신화’도 외설 논란에 휩싸이며 6년이란 긴 시간을 법정에서 보내야 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큰 피해를 보았고, 무엇보다 작품 활동에 대한 열의까지 꺾이는 뼈아픈 경험이었지만 이현세는 그 모든 경험이 자신을 좀 더 폭넓은 시야를 갖도록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 가장 최근에 제작된 허영만 만화 원작의 영화인 ‘타짜2’.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를 거치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이현세와는 달리 허영만은 꽤 무난한 작품 활동을 하며 21세기를 보내는 중이다. 화투판의 이야기를 담은 ‘타짜(2000)’, 음식을 소재로 한‘식객(2003~2010)’, 관상을 다룬 만화인 ‘꼴(2008)’까지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있으며, 그의 작품들을 영화화, 드라마화하려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1등은 못해도 좋으니 5등 안에는 들자’는 신념을 지닌 허영만의 꾸준함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 만화계는 이현세, 허영만 두 사람 모두에게 큰 빚을 졌다. 이현세는 까치를 통해 만화라는 장르를 대중화시키며 독자층을 폭발적으로 넓혀 주었고, 허영만은 다양한 이야기로 우리 만화의 깊이를 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두 사람의 작품 활동이 아직도 활발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만화의 부흥기라 할 수 있었던 1980~1990년대에 활동했던 수많은 만화가들이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못해 도태되어버린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과거, 좁고 어두운 대본소에서 만화를 만나던 시절에서 이제는 디지털 기기를 통해 만화를 접하는 시대로 변했지만, 이현세와 허영만은 여전히 각자 자신이 가장 잘하고, 가장 좋아하는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월간탁구 201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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