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IND> 탁구역사 돌아보기

탁구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19세기에 더운 나라에서 식민 지배를 하던 영국인들이 더위를 피해 즐길 수 있는 실내 놀이로 창안했다는 주장이 통설이다. 초기에는 실내 바닥에 네트를 치고 코르크나 피륙으로 엮어 만든 공을 나무나 마분지 같은 것으로 쳐서 넘기는, 그야말로 실내 테니스나 다름없는 형태였다.

탁구가 현대와 비슷한 모양을 갖춘 것은 셀룰로이드 공의 사용 이후부터다. 1898년 영국인 제임스 깁이 미국 여행 중 가져온 장난감 공을 이용한 것이 시초였는데, ‘핑퐁(Pingpong)’이란 별칭도 이때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쇠가죽 라켓으로 이 공을 칠 때 나는 소리를 본 땄다는 거다. 이전까지 탁구는 고시마, 프림프람, 위프와프 등등 제 각각으로 불렸었다.

지난해인 2014년 하반기에 탁구공의 대세가 플라스틱으로 바뀌었으니 셀룰로이드 공은 무려 116년간 세계 탁구계를 지배해왔던 셈이다. 플라스틱 공의 등장이 단순한 재질 변화를 넘어 어딘지 아쉽고 아련한 느낌마저 주는 것은 그만큼 셀룰로이드 공이 현대 탁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실제로 셀룰로이드 공의 도입 이후 탁구는 그에 맞는 용구개발, 기술변화와 더불어 빠르게 발전했다. 1900년경에는 전 유럽에 널리 보급됐다. 러버(rubber)가 발명된 1902년에는 영국핑퐁연맹이 처음 조직됐고, 1923년에는 몇 몇 유럽 국가에서 공식명칭을 ‘핑퐁’에서 ‘테이블테니스(Table Tennis)’로 개칭했다. 1926년에는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등의 대표가 모여 국제탁구연맹(ITTF)을 결성했으며, 국제탁구연맹에서 규칙과 용구에 관한 규정을 제정한 이후 탁구는 전 세계인이 즐기는 스포츠로 발전했다.

특기할 것은 탁구의 초창기를 돌아볼 때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바로 1902년이라는 것이다. 현대 탁구에서 절대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러버가 고안된 1902년은 영국핑퐁연맹이 처음 조직된 해이기도 하다. 운동도 운동이지만 행정적 체계의 시초가 바로 그때라는 것이 중요하다. 정작 국제탁구연맹 첫 결성 때는 빠졌지만 영국을 탁구의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큰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핑퐁연맹 창설 이듬해에는 제1회 유럽탁구선수권대회가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개최됐는데, 국제적 교류가 가능한 스포츠로서 탁구가 첫 발을 디딘 역사적인 대회였다.

탁구에 관한 기록들이 문서상으로 정리되어 축적되기 시작한 것도 1902년경부터다. 탁구역사에서 ‘서기(西紀)’의 첫 해는 결국 1902년으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는 얘기다. 국제탁구연맹 박물관에 전시된 초창기 탁구역사 자료가 대부분 1902년의 꼬리표를 달고 있다는 것 또한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내친 김에 1902년, 탁구 서기 1년의 모습은 어땠을까? 당시는 탁구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완전히 갖추기 전이지만 현대를 향한 걸음이 무척 빨라지던 시기였다. 국제탁구연맹(ITTF) 박물관에서 빌려온 사진들이다.

▼ 이미 셀룰로이드 공이 자리를 잡은 시기였다. 이렇게 생긴 공을 이렇게 생긴 케이스에서 꺼내서


 

▼ 이렇게 생긴 라켓으로 쳤다. 나무와 그물 모양, 가죽라켓이 혼재하고 있었는데 나무나 알루미늄 라켓 등에 그려진 그림들은 탁구에 대한 유럽인들의 예술적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라켓이라기보다 예술작품에 가까운 것들도 있다. 기모노를 입고 있는 일본 여성의 그림이 그려진 블레이드는 이미 일본에도 탁구가 보급됐다는 것을 알게 한다.



▼ 떨어진 공은 이렇게 생긴 수거기(Ball retriever)로 가져온다. 요즘 볼 수 있는 형태와도 비슷하다.


▼ 네트의 모양도 특이하다. 테이블 규격이 고정된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그 모양과 크기도 제 각각이다. 특히 탁구대에 부착시키기보다 테이블 위에 세우는 기능도 함께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주대 없이도 설치가 가능한 네트가 있었다. 네트에 수놓아진 그림들 역시 예술적 인식이 함께 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 그렇다면 테이블은? 초창기 탁구는 고정적인 규격이 없었다. 말 그대로 일상의 테이블이 바로 탁구대였다. 그 때문인지 1902년 기록에도 별도의 탁구대 사진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당시 탁구를 하던 모습이 촬영된 사진이나 그림들에서 그 형태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단, 대회를 연 것 같은 모습의 사진에 나타나듯 테이블의 규격, 각 엔드의 라인 등이 일정하게 정해지기 시작한 해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남녀노소 다 같이 할 수 있는 종목의 특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아프리카 원주민이 탁구를 하고 있는 모습은 식민지에서 병사들이 시작했다는 기원설에도 힘을 실어준다. 재소자들이 탁구를 하는 모습이 담긴 그림도 있다.


▼ 대회를 열면 상품도 있게 마련! 입상 부상으로 주어졌었던 기념품, 펜던트, 브로치 등 소품들이다.



▼ 별도의 스코어보드도 없었다. 이게 당시의 점수기록장이라는데 어떻게 썼던 걸까?


 

▼ 1902년 무렵 영국과 미국 등에서 발행됐다는 탁구교본들이다. 당시 새로운 스포츠로 탁구 붐이 일기 시작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70년대 이후 탁구인기가 거의 완전히 가라앉았던 미국에서는 최근에 다시 탁구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그 중심에는 탁구애호가로 알려진 영화배우 수잔 서랜든이 문을 연 핫-플레이스 ‘핑퐁’이 있다. 우리나라 선수 출신 이수연 씨가 바로 수잔 서랜든의 ‘탁구쌤’으로 잘 알려져 있다. 초기부터 따지면 인기가 다시 살아나기까지 백여 년이 훌쩍 흐른 시간이다. 유행은~ 돌고! 돌고! 돌고!



사실 위에 모아놓은 사진들이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니다. ITTF 박물관에 1902년으로 기록돼 있지만 그 시기에 모았을 뿐이지 훨씬 이전의 모습도 있고, 그 이후의 모습도 기록의 오류로 포함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단지 가장 많은 자료가 양산된 1902년을 탁구의 ‘서기 1년’으로 기록할 수 있는 근거는 오히려 그래서 더 명확하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하기야 그 시작이 어떤 모습이었든 당대의 오류를 줄이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로의 탁구 도입은? 그 경로는 분명하게 남아있는 기록이 없지만 두 가지 정도로 추정된다. 한일강제병합을 전후로 일본으로부터 유입됐다는 설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선교사들이 종교 전파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설이다. 대한탁구협회에서는 1924년 경성일일신문사에서 주최한 ‘핑퐁경기대회’를 한국탁구대회의 효시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탁구가 소수 계층의 유희를 넘어 대중스포츠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무렵부터다. 한국 탁구를 총괄하는 대한탁구협회는 일제로부터 벗어난 1945년 9월에 결성된 조선탁구협회가 전신이다. 1947년에 대한탁구협회로 개칭하면서 첫 사업으로 전국남녀 종합탁구선수권대회를 열었다. 지난해 말 치러진 종합선수권은 제68회 대회였고, 현 대한탁구협회 수장인 조양호 회장은 제20대 회장이다. (사진출처_ITTF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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