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앤디 워홀 VS 로이 릭턴스타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서양화 사조인 인상파는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들이 주축이었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의 새로운 예술 사조가 잇따라 등장했지만, 유럽, 그중에서도 프랑스 파리가 화가들의 중심 활동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유럽에서 발발된 세계대전의 여파로 예술가들과 미술 시장이 미국 뉴욕으로 옮겨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 앤디 워홀과 로이 릭턴스타인


똑같은 아이디어를 가진 작가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럽의 작가들과 작품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동해온 것은 미국의 젊은 작가들로 하여금 미국적 정체성을 찾도록 하는 계기가 되어줬다. 특히 60년대 이후 등장한 팝아트는 미국의 상업주의와 소비주의 속에서 발달한 대중문화가 탄생시킨 새로운 미술 사조였다. 그리고 앤디 워홀과 로이 릭턴스타인은 그렇게 탄생한 팝아트의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1928년 체코 이민자 부모의 사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앤디 워홀은 어린 시절부터 잦은 병치레에 시달리던 허약하고 소심한 소년이었다. 조용히 혼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던 워홀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빠듯한 살림 속에서도 미술 재료를 마련하고 영화와 만화를 볼 수 있도록 프로젝터를 사들이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4세에 광부로 일하던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생활은 더 어려워졌지만, 어머니의 뒷바라지로 그는 미술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 상업 예술을 공부한 후 뉴욕으로 온 워홀은 보그, 하퍼스바자, 글래머 등의 유명 잡지에 일러스트를 그리면서 사회적 명성과 함께 큰돈까지 벌게 된다. 그러나 잡지에 광고를 만들고 일러스트를 그려주는 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구를 버릴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표현할 방법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선택한 소재는 다름 아닌 그의 어린 시절부터 늘 가까이 있었던 만화였다.

1923년 뉴욕 맨해튼의 중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난 로이 릭턴스타인은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여러 대학의 강사나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당시 유행하는 추상주의와 입체파, 표현주의 등을 들쑥날쑥 넘나들며 뚜렷한 자신만의 화풍은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1년에 발표한 ‘이것 봐, 미키(Look Mickey)’라는 작품으로 단번에 대중과 미술계의 이목을 끌게 된다. 디즈니의 캐릭터인 미키마우스와 도널드덕이 등장하는 이 그림은 만화처럼 말풍선을 그려놓고 그 안에 대사까지 집어넣어 독특함을 더했다. 
 

▲ 릭턴스타인의 첫 만화작품 ‘이것봐, 미키(Look Mickey)’.

릭턴스타인이 팝아트, 그것도 만화를 소재로 사용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평소 디즈니 만화를 즐겨보던 릭턴스타인의 어린 아들이 풍선껌 포장지에 그려진 미키마우스를 보여주며 ‘내가 장담하는데 아빠는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릴 수 없을 거야’라고 말했고 그런 아들을 위해 미키마우스를 그려주면서 만화가 강력한 임팩트와 표현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보다 더 대중적인 소재를 찾다

▲ 릭턴스타인 작품을 가까이 보면 벤데이 점을 볼 수 있다. 

당시 미국 미술 시장에서 큰 손으로 불리던 카스텔리는 전설적인 아트 딜러로서 수많은 화가를 후원하고 전시회를 열었던 인물이다. 젊은 작가들에게 그의 후원 하에 들어간다는 것은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뉴욕의 백화점에서 전시했던 자신의 만화작품들이 꽤 좋은 반응을 얻자 워홀은 그것들을 자신 있게 카스텔리에게 선보이며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했다. 그러나 카스텔리는 뜻밖에도 몇 주 전 워홀처럼 만화를 소재로 작품을 만드는 릭턴스타인이라는 작가와 계약했음을 알리며 그를 돌려보낸다. 그리고 만화라는 소재를 통해 작품 활동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워홀은 카스텔리와 계약을 맺었다는 릭턴스타인의 작품을 보고는 그 생각을 접고 만다. 화가의 특징이 엿보이지 않는 비개성적인 그림에 만화라는 대중적인 소재를 취한 것까지 두 사람의 아이디어는 똑같았지만 릭턴스타인의 그림에는 워홀의 그림에는 없는 특징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릭턴스타인 작품의 특징으로 손꼽히는 벤데이 점(Ben day dots)이었다. 워홀은 릭턴스타인의 작품을 접한 후 “난 왜 저런 생각을 못 했지?” 하며 만화 작품만큼은 릭턴스타인의 것이 더 낫다고 순순히 인정하고 새로운 소재를 찾아 나서게 된다. 
 

▲ 워홀의 만화작품이었던 ‘딕 트레이시(Dick Tracy, 좌)’와 워홀의 정체성을 찾게해준 작품인‘캠벨 수프 통조림(Campbell’s Soup can, 우)’.


고심하던 워홀은 어느 날 어머니가 자신에게 늘 먹이던 캠벨 수프 통조림을 보고 그것을 그리기 시작한다. 미국인이라면 한 번쯤 먹어봤을 캠벨 수프 통조림은 누구에게나 친근한 소재였고 그가 지향하는 대중적인 이미지에 걸맞은 것이었다. 때마침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팝아트에 대한 언론의 호의적인 보도에서 캠벨 사의 수프 통조림을 반복해서 그려대던 그의 이름이 거론된 것도 워홀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후 그는 코카콜라, 달러 표시, 마릴린 먼로, 재클린 케네디, 엘비스 프레슬리 등의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이미지를 일종의 판화 기법이라 할 수 있는 실크 스크린으로 찍어 내기 시작했다. 실크 스크린을 통해 똑같은 이미지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그림들이 과연 작품이라 할 수 있느냐는 비판적인 여론도 있었지만 워홀은 오히려 자신을 ‘상업 예술가’라고 자칭하고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factory)’이라 부르며 상업 미술과 순수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 워홀 작품의 특징인 실크 스크린 작업을 하는 모습.

 

팝아트, 가장 대중적인 예술
워홀과 릭턴스타인이 활동하던 시기는 대량 생산과 소비가 이뤄지면서 그것을 기반으로 대중문화가 급속도로 발달한 시기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새로운 것들이 매일매일 등장했지만, 미술은 ‘초현실주의’와 ‘추상주의’라는 이름으로 그런 세상과 점점 동떨어져 갔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등장한 ‘팝아트’는 내부세계가 아닌 외부세계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그대로의 주변 환경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시작했다. 은유와 상징이란 이름으로 난해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기보다 가까이 있는 물건이나 현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미술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 팝아트의 중심에 바로 워홀과 릭턴스타인이 있었다. 
 

▲ 국내 대기업 비자금 스캔들에 휩싸였던 릭턴스타인의‘행복한 눈물(Happy Tears)’과 대표적인 워홀의 작품‘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2007년, 국내 대기업의 비자금 스캔들에 얽혀 유명해진 릭턴스타인의 ‘행복한 눈물(Happy Tears)’을 뉴스에서 보게 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저 만화 그림을 대형 확대해 놓은 것 같은 그림이 3백  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거래됐다는 사실이 일반 대중에게는 터무니없어 보였다. 그러나 만약 워홀이나 릭턴스타인이 아직도 살아있었다면 그런 대중의 반응에 오히려 열광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팝아트(popular+art)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워홀은 관련 기업의 로고를 실크 스크린으로 대량 제작하고, 릭턴스타인은 만화 이미지에 그럴듯한 대사를 삽입해 그 사건에 대한 느낌을 대중에게 전달했을지도 모른다. 대중에게 친근한 사물이나 사건들을 화폭에 고스란히 옮겨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팝아트적인 정신이니 말이다. 

<월간탁구 2015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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