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걷기 좋은 길

다비드 르 브르통의 산문집 ‘걷기 예찬’에는 이런 글이 있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오롯이 걷는 일에 몰두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장에 담긴 걷기에 대한 의미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즐거운 명상에 빠져들기 안성맞춤인 이 봄, 혼자 걸으면 행복하고, 여럿이 걸으면 즐거운 걷기 명소를 소개해본다.

서산의 해미읍성과 개심사

개심사

해미읍성은 순천의 낙안읍성, 고창의 모양성과 함께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읍성으로 유명하다. 조선 시대 성종 때 만들어진 해미읍성은 이순신 장군이 열 달 정도 근무를 하기도 했었고 다산 정약용이 열흘간 유배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병인양요 이후 천주교 박해로 천여 명의 신도들이 처형된 아픈 역사를 가진 장소로 유명하다. 아직도 읍성 안에는 옥사와 그들을 묶어놓고 고문했다고 전해지는 회화나무가 그 현장을 지키고 있지만, 요즘처럼 봄바람이 불어오면 만개한 유채꽃이 역사의 상처를 치유라도 하듯 눈부신 노란빛을 선사하는 곳이다. 그렇게 화사한 봄빛 가득한 해미 읍성을 뒤로하고 개심사로 향하면 먼저 해미향교를 지나게 되고 이어 고창마을과 신창 저수지에 이르면 곧 개심사를 만나게 된다. 개심사로 가는 길 주변은 목초지로 둘러 쌓여있어 한가롭고도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하지만, 이곳은 원래 조선 시대 12진산 중 하나였던 상왕산으로 제3공화국 시절에 울창한 나무숲을 모두 베어내고 목장으로 조성된 곳이다.

그렇게 드넓은 목초지와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꽃을 바라보며 저수지를 휘휘 돌아가면 개심사의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개심사는 드물게 임진왜란에도 전화를 입지 않은 덕분에 절집의 예스럽고도 자연스러운 멋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명소다. 개심사 뒤편의 산신각으로 올라 화려한 진달래로 장식된 개심사를 바라보면 자기도 모르게 이 봄의 향취에 흠뻑 빠져들게 될 것이다.

섬진강 상류, 진메 마을에서 장구목까지

섬진강은 총 길이가 200km가 넘는, 남한에서는 네 번째로 긴 강이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하여 전남곡성, 경남 하동을 거쳐 전남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섬진강변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자랑하고 있어 걷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오래전부터 큰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요즘처럼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광양의 매화나무, 구례 산동의 산수유 꽃이 경쟁이라도 하듯 꽃망울을 터뜨리며 여행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섬진강변 중에서도 상류, 적성면을 흐르는 구간을 적성강이라 부르는데 이 구간에 자리 잡고 있는 천담 마을에서 구담 마을까지 가는 약 3km에 달하는 길은 각종 매스컴이나 기관에서도 손꼽는 ‘한국에서 가장 걷고 싶은 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오지마을이었던 구담 마을에 들어서면 마을의 자랑거리인 오래된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마을을 수호하듯 위풍당당한 느티나무 동산에 올라 잠시 일대를 둘러보다 보면 강 건너 회룡 마을로 들어서는 징검다리가 보인다. 물길은 얕아도 종종 비와 함께 물속으로 사라져버리곤 한다는 이 돌다리를 건너면 행정구역상 임실군에서 순창군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곳에 사는 얼마 되지 않는 마을 사람들이 혹시라도 외부인의 소란스러움에 언짢아하지는 않을까 조용조용 마을을 지나가면 어느새 장구목에 도착한다. 수천, 수만 년의 시간 동안 흘러내려 온 섬진강의 물줄기와 돌에 의해 여기저기 오목조목하게 깎인 바위들이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장구목에서 그곳의 상징이기도 한 요강 바위를 바라보며 수 십 년 전에 그 큰 바위를 통째로 훔쳐갔다던 간 큰 도둑을 떠올려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역사의 숨결이 숨어있는 서울 성곽길

서울성곽길

서울 성곽길은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는 총 길이 18.2km의 역사 탐방길이다. 이 코스는 임의로 만든 길이 아니라 실제로 서울을 수백 년 간 지켜온 성곽을 따라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성곽의 흔적을 하나하나 짚으며 걸을 수 있다. 동대문에서 한성대 입구를 이르는 코스처럼 잘 복원된 성곽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코스가 있는가 하면 강북삼성병원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코스처럼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코스도 있지만 길을 걷는 동안 곳곳에서 수도 서울의 오랜 역사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신궁터나 경고장, 윤동주시인의 언덕, 배재학당의 옛터와 같은 곳을 지나다 보면 새삼 서울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의 수도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성곽을 따라 야간조명을 켜놓기 때문에 해가 진 후에 걸으면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오래된 성곽에 기대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다면 수십, 수백 년 전부터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삶에 나도 모르게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다.

 글_서미순(월간탁구 2013년 4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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