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아디다스 VS 푸마

사람들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의 영광은 헝가리가 가져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헝가리와 함께 결승전에 진출한 독일은 예선에서 이미 헝가리에 3 : 8로 대패한 전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승컵을 손에 쥔 것은 뜻밖에도 독일이었다. 그리고 독일 우승의 순간을 그 누구보다도 벅찬 가슴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람은 독일축구대표팀의 운동화를 만든 아디다스의 창업자 아돌프 다슬러였다. 또한 이 열광적인 분위기에 동참할 수 없는 유일한 독일인은 아돌프의 친형이자 푸마의 창업자인 루돌프 다슬러였다.
 

▲ 아돌프 다슬러와 루돌프 다슬러

세탁소집 아이들 시절

독일의 작은 도시 헤르초게나우라흐의 신발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세탁소를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루디(루돌프)와 아디(아돌프)는 큰 형 프리츠와 함께 ‘세탁소집 아이들’로 통했다.

뮌헨의 은행에서 일을 시작한 큰 형과는 달리 루디와 아디는 아버지에게 신발 만드는 법을 기초부터 배워나갔고 몇 년 후 아디는 어머니가 운영하던 세탁소 자리에 신발 공장을 차렸다. 1920년에 처음 공장을 차렸던 당시 회사 직원은 아디를 포함하여 세 명뿐이었지만 몇 년 후 장사에 재주가 있던 루디가 합류하면서 사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24년, 다슬러 형제는 마침내 정식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두 사람은 독일 내에서 고조되기 시작하는 스포츠 열기를 감지하고 자신들이 만든 스포츠화와 카탈로그를 전국의 스포츠 단체에 보내면서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다슬러 형제의 사업은 나치 체제 하에서 더욱 빛을 발했는데, 독일의 권력자들이 스포츠가 군사적 미덕을 함양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다슬러 운동화가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첫 번째 사건은 총통 히틀러의 기분을 매우 상하게 했다. 독일 아리아족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유치한 베를린 올림픽의 멀리뛰기 시합에서 독일 선수를 제치고 우승한 미국의 제시 오웬스가 흑인선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상에서 모두 네 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제시 오웬스가 시상대에 올랐을 때 신고 있던 신발은 다름 아닌 다슬러의 러닝화였다.
 

▲ 아디다스와 푸마의 로고.

갈라진 형제, 반쪽짜리 회사

다슬러 신발이 올림픽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지만 루디와 아디 사이는 조금씩 나빠졌다. 특히 아디가 장사와는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일 때면 루디는 자제력을 잃었고, 아디 역시 떠들썩하기만 형이 탐탁지 않았다. 시끄러운 독일 내 정치 상황 속에서 각기 다른 성향을 보인 점 역시 두 사람의 불화를 부채질한 요인이었다.

결정적으로 2차 대전 중에 가해진 연합군의 폭격을 피해 아디와 그의 아내가 방공호로 갔을 때 이미 그곳에 먼저 대피 중이던 루디는 아디가 폭격기를 향해 “죽일 놈들이 또 나타났군.”이라고 중얼거린 말을 자신에게 한 말이라고 확신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결국, 두 사람은 1948년 4월에 완전히 갈라서고 말았다. 그리고 아디는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 ‘아디다스’를, 루디 역시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 ‘루다’를 설립했다. 그러나 ‘루다’라는 이름이 세련되지 못한 느낌에 곧바로 ‘푸마’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등기를 신청했다.

▲ 아디가 축구화의 나사형 스파이크를 교체하고 있다. 

두 사람의 분열로 회사 경영에도 차질이 생겼다. 판매와 관리팀은 루디를 따라갔고, 기술자들은 아디를 따랐다. 반쪽이 된 두 회사의 한쪽은 판매할 물건이 없었고, 또 다른 쪽은 판매 인력이 부족했다. 그래도 초반에는 확실한 판매망를 가지고 있던 푸마의 매출이 급상승했다. 그러나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을 계기로 아디다스도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많은 금메달리스트가 아디다스의 상징인 3개의 줄이 들어간 신발을 신고 있었고 덕분에 해외 신발 제조업자들과도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구계에서는 여전히 푸마의 신발이 더 각광을 받고 있었다. 푸마의 신발은 다른 축구화들보다 훨씬 세련되어 보였고 루디는 독일축구대표팀 감독인 헤르베르거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리가 당신을 갈아치워 버리겠다.”라는 막말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고압적인 루디의 태도에 실망한 헤르베르거는 독일축구대표팀에 축구화를 제공하는 일을 아디에게 부탁했고, 그는 독일이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의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까지 운동장을 직접 쫓아다니며 선수들의 축구화를 살폈다. 특히 아디는 축구장의 잔디 사정에 따라 길이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나사형 스파이크가 달린 축구화를 만들었는데 이는 비가 내린 결승전 경기에서 독일팀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독일의 우승과 함께 전 세계는 아디 다슬러의 축구화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루디에게는 뼈아픈 사건이었을 뿐이다.
 

스포츠 마케팅 전쟁

1950년대, 아디다스와 푸마는 당당히 스포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상표로 성장했다. 푸마는 독일 축구 리그에서 여전히 유리한 고지를 지키고 있었다. 반면 아디다스는 세계적인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헤르베르거의 후광으로 독일 축구대표팀과 남다른 유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균형은 1956년의 멜버른 올림픽 때부터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멜버른 올림픽은 전 세계에 TV로 중계된 최초의 올림픽이었다. 아디는 이 올림픽이 아디다스에게 최고의 무대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를 위해 아디는 아들 호르스트를 멜버른으로 보냈고 호르스트는 올림픽 참가 선수들에게 조건 없이 운동화를 선물하는 결단을 내렸다. 기대대로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스포츠 마케팅’에 먼저 눈을 뜬 아디다스는 점점 푸마와의 격차를 벌리며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 펠레가 푸마 축구화를 신고 환호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형제가 함께 신발을 만들던 시절부터 영업을 도맡아했던 루디의 푸마는 아디다스의 영업 전략을 따라잡기 급급했다. 아디다스를 본받아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적극적인 스포츠 마케팅전을 펼쳤지만 이미 높은 인지도를 가진 아디다스를 따라잡긴 힘들었다. 그러나 1970년 드디어 역전의 기회를 맞이한다.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축구 영웅 펠레에게 푸마 축구화를 신게 한 것이다. 그것도 이미 슈퍼스타였던 펠레에게는 자신들의 신발을 신기기 위한 접근을 하지 말자는 아디다스와의 암묵적인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말이다.
 

아디다스와 푸마, 화해의 길

1974년 루디가 사망하고 4년 뒤 아디가 그 뒤를 따를 때까지 형제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두 사람은 헤르초게나우라흐 묘지의 가장 반대편에 매장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갈등은 두 사람의 자녀들이 사업을 물려받은 후에도 계속됐다. 그러나 지난 2009년 아디다스와 푸마의 60년 갈등은 종지부를 찍었다. 독일의 영화 제작자인 제레미 길레가 주선한 ‘peace one day’ 행사를 통해 양사의 대표가 악수를 하며 화해한 것이다. 두 회사의 본사가 있는 헤르초게나우라흐의 주민들도 화해에 동참하여 상의는 푸마를, 바지는 아디다스를 입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반목으로 얼룩진 세월의 앙금을 털어냈다. 하지만 다슬러 집안 사람들이 두 회사의 경영에서 손을 뗀 것이 이미 오래전의 일임을 생각해보면 기업의 화해는 이뤄졌지만, 다슬러 가의 화해까지 이루어진 것인지는 의문이다. 
참고 : 운동화 전쟁(바바라 스미트 지음)
 

▲ 아디다스와 푸마의 운동화.

<월간탁구 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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